정객들, 요릿집에서 국사 논하고 풍류 즐겨

1885년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에 진고개 요릿집과 1887년 일본 기생을 둔 화월루(花月樓)와 친일파 송병준의 청화정(淸華亭)이라는 일본 요릿집을 차리자 1909년 대한제국 궁내부 주임관 안순환(安淳煥)이 궁녀를 데리고 나와 최초의 조선요릿집인 명월관(지금의 광화문 동아일보 자리)을 개업한다.

이때의 요릿집은 기생의 가무(歌舞)가 있는 요릿집이었다.

1912년 12월 18일자 매일신보에 명월관을 조선요리의 시조(始祖)라고 제목을 뽑고, "별의별 약주가(藥酒家), 전골집, 냉면집, 장국밥집, 설렁탕집, 비빔밥집, 강정집, 숙수집 등이 나무젓가락 불결한 그릇에 팔고 있으나 신식적이고 청결하고 완전한 조선요리점을 당시 이천원(二千圓)의 자본(資本)으로 창설하였는데, 건물은 신라식, 조선식, 서양식으로 대소연회가 가능케 하였으며 천 삼사백명의 초대회나 환영회는 명월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기록되었다.

명월관은 3층으로 건평이 무려 300평이나 되며 방(房)이 대소(大小) 2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규모였으며 명월관에서는 조선요리는 물론 서양요리도 하였다고 한다. 이 명월관의 요리는 당시 그 맛에 대해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져 유명하였다고 한다.

특히 1913년부터는 십삼만원(十三萬圓)의 자금(資金)을 들여 각처에 지점도 두었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완용의 별장을 사들여 차린 명월관의 분점 태화관(太華館 : 지금의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완용의 별장이었던 이 태화관을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의 장소로 택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2층 끝 방에 모여 고종황제의 빈소가 있는 남쪽 문을 열어 놓은 후 한용운(韓龍雲)의 사회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렇듯 요릿집은 단순히 밥을 먹는 장소가 아니라 정객들이 국사를 논하고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함께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조선요릿집들이 서울 장안에 수십 집이 생겼으나 맛을 도외시하고 상술에만 눈이 어두워 비판을 받게 된다.

1921년 4월 4일자 동아일보에 조동원이 조선요리옥에 대해 "한갓 이익에만 눈을 뜨고 영원히 조선요리의 맛깔 좋은 지위를 지속할 생각은 못한 결과 서양 그릇에 아무렇게나 담고 신선로 그릇에 얼토당토않은 일본요리 재료가 오르는 등 가석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맛집 비평을 실을 정도였다.

안순환은 1928년 5월 1일자 <별건곤> 식도원주(食道園主)에 '조선요리의 특색'이란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안순환은 서양음식, 중국음식, 일본음식과 조선음식을 비교하면서 "조선음식은 첫째, 제철에 나는 재료로 만든 음식이 많고. 둘째, 양념으로 인해 음식 맛이 좋고. 셋째, 음식배열의 규칙이 정연하고. 넷째, 여러 가지 음식을 한상에 모아 놓아서 손님을 접대하는데 좋다"고 했다.

역시 조선요리 대가(大家)답게 조선요리의 특징을 너무 잘 표현한 지적이다.

조선요릿집이 한정식집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재료나 음식 모두가 국적불명의 요리로 다 변했다. 한국 음식 특유의 깊은 맛은 사라진 지 오래고 한식 요리도 일식이나 양식처럼 표준화 한답시고 요리법이 간편 단순해 옅은 맛뿐이다.

그러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는 요리와 소스가 겉도는 맛이다. 이런 요리법은 서양의 구이문화에서 오는 조리법과 일본의 단순한 모방문화에서 온 조리법이다. 소스가 필요한 구이나 찜 등의 한식은 이미 한식이 아니다. 한식은 구이나 찜이라 할지라도 원재료와 그 재료에 배어 있는 양념이 조화된 감칠맛이 나야 한다.

요릿집이 요정과 한정식집으로 탈바꿈 되면서 요정은 '대원'(서울 종로구 교북동 11-2 전화 02-747-1826) '태평'(서울 강남구 역삼동 824-8, 전화 02-588-0887) '다보'(서울 강남구 역삼동 832-23 전화 02-566-7978)에서 신선로, 구절판, 전복초 등 전통음식을 선보이고 있는데, 문제는 가무가 있는 술집이라는 사실이다.

그 외 분위기로나 요리가 전통적인 한식 위주로 나오는 집은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종손인 이병무 씨가 운영하는 수서의 '필경재'(서울 강남구 수서동 739-1 전화 02-445-2115)와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을 개조한 '석파랑'(서울 종로구 홍지동 125번지 전화 02-395-2500-1) 등이 있다.

맛있는 경남지역 한정식집

한국에서 맛 하면 뭐니뭐니 해도 전라북도 전주와 경상북도 안동을 빼놓을 수 없다.

전주의 한정식은 한옥마을의 '오목대 사랑채'(전화 063-232-8533)를 들 수가 있으며, 백반집은 '한밭식당'(전화 063-284-3367)과 '다문'(전화 063-288-8607)이 맛이 있다. 한편 담양의 '전통식당'(전남 담양군 고서면 고읍리 688-1 전화 061-382-3111) 도 반상차림이 꽤 토속적이며 맛이 있다.

안동에서는 99칸의 고가인 지례예술촌(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 산 769 전화 054-822-2590)에서는 안동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명태 삼색 보풀리기등 소박한 선비 밥상을 차려 내며 전통한옥 체험도 할 수가 있다.

마산은 신마산의 '망월루(望月樓)'와 1914년부터 여관업과 겸업으로 운영하던 오동동(午東洞)의 '산해관(山海館)'이 있었으나 이 두 집은 당시에 요정이었으며, 1921년에 서울 사람인 이영석(李永錫)이 수성동(壽城洞) 해안에 위치한 초가(草家)를 얻어 '한양관(漢陽館)'이라는 요릿집을 차린 것이 마산에서 최초의 한식전문집이라 하겠다.

이영석은 서울에서 숙수(熟手:지금의 요리사)를 직접 데리고 왔는데 요리솜씨가 뛰어나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중성동(中城洞) 손감찰댁(孫監察宅) 이층집으로 이전했다가 해방후 반도여관 자리로 이전하는 등 발전을 거듭해왔다.

마산을 비롯한 창원, 김해, 진해, 거제 등 한정식 집에는 대부분 싱싱한 생선회나 해물들이 중심이 되어 상에 오른다.

마산에서 비교적 음식 맛이 괜찮은 한정식 집으로는 '산촌 한정식'(마산시 중성동 75-5 전화 055-244-7575), '가얏골 한정식'(마산시 오동동 307-6 전화 055-224-0058) 등이 있다. 진해에서는 '비원 한정식'(진해시 풍호동 83-106 전화 055-551-1800)과 진해 용원의 '두레 한정식'(진해시 용원동 1195-12 전화 055-552-2462)이 바닷가와 연해의 싱싱한 해물과 생선회로 맛을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싱싱한 생선회와 다양한 해물 맛으로 거제를 찾는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집은 '락희 한정식'(거제시 신현읍 문동리 172-1 전화 055-638-1241)이다. 이 집의 다양한 생선의 회 맛도 회 맛이려니와 멍게 비빔밥의 맛이 멍게 향과 함께 감칠맛이 돈다.

같은 경상도이면서도 진주 음식은 약간 격이 다르다. 경상도 감영이 있던 곳이라 반가 음식은 물론 교방음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진주다. 이러한 영향 탓인지 진주의 한정식은 생선회나 해물 위주이기보다 호두장과 건 구절판 등 전통음식들이 다양하게 20~30가지가 나온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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