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다시마·무·고기 듬뿍 넣어 푹 끓인 맑은 장국...설렁탕, 뼈를 넣고 오래 끓여 국물 뽀얗고

곰국과 설렁탕은 어떻게 다를까?

조자호(趙慈鎬)의 <조선요리법(1939년)>에 장국, 육개장, 곰국이 나오나 설렁탕이 보이지 않는다. 방신영(方信榮)의 <조선요리(1940년)>에도 역시 맑은 장국, 육개장, 곰국이 나오나 설렁탕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손정규(孫貞圭)의 <조선요리(1940년)>에 곰국, 육개장, 설렁탕이 등장한다.

여기서 손정규는 곰탕과 설렁탕을 이렇게 구별하고 있다

'곰국(湯汁)은 사태, 쇠고리, 허파, 양, 곱창을 덩어리째로 삶아 반숙(半熟)되었을 때 무, 파를 넣고 간장을 조금 넣어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를 꺼내어 잘게 썰어 숙즙(熟汁)에 넣고 호초(胡椒)와 파를 넣는다'고 하였으며, '설렁탕은 우육(牛肉)의 잡육(雜肉), 내장(內臟)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殘部)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 경성지방(京城地方)의 일품요리로서 값싸고 자양(滋養)이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위 내용으로 볼 때 설렁탕은 곰국에 비해 뼈가 많이 들어가 있어 장시간에 걸쳐 고음하므로 골수(骨髓)가 녹아 국물이 뽀얗고 진한 것을 말한다.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 선생은 설렁탕의 유래에 대한 두 가지 속설의 예를 들었는데, '한 가지는 우리말에 영향을 끼친 몽고어에 고기국을 '슐루'라 하니 고려시대 이 몽고어가 들어와 '슐루탕'이 설렁탕으로 음운변화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이 보다 유력한 것으로,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과의 연관설이다. 신라시대 이래 농사의 삼신(三神 :先農, 中農, 後農)을 모셔 왔는데, 조선왕조에 들어 선농(先農)만을 제기동에 모셨다 한다.

매년 2월말 상신일(上辛日)에 선농단에 제사를 지내는데, 선농신에게 바친 신성한 희생물인 소를 잡아 국을 끓였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임금에게 먼저 제주(祭酒)를 권하고 탕(湯)을 올리는데, 탕을 올릴 때 헌시(獻詩)를 했다고 한다. 이 헌시에 보면 '살찐 희생의 소를 탕으로 하여 널리 펴시니 사물(事物)이 성(盛)하게 일고 만복(萬福)이 고루 펼치니…'라고 적혀 있다.

희생물인 소를 잡아 탕을 끓여 선농단에 제사를 지내고 상하, 관민, 귀천 없이 모두 골고루 나누어 먹던 쇠고기곰국을 선농탕(先農湯)이라 했고, 그것이 변해 설렁탕이라 했다고 한다.

해방 전후만 해도 종로 주변에 이문옥(里門屋), 대창옥(大昌屋), 사동옥(寺洞屋), 이남옥(梨南屋), 대성관(大成館) 등 설렁탕집이 대 여섯 군데가 있었으나 옛 화신 백화점, 지금의 국세청 뒤에 위치한 이문옥(里門屋)(대표 전성근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국세청 뒤, 전화 (02)733-6526)이 里門설렁탕집으로 상호를 바꿔 지금까지 100여년의 역사와 함께 그 맛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설렁탕의 뿌리는 아무래도 고음국, 즉 곰탕이다.

1800년의 <능소화다식(陵所花茶食)조석상식발기(朝夕上食勃起)>에 '고음탕'이 나오고 1800년대 사전(辭典)인 <제물평(諸物評)>에 '자복은 곰탕이다'고 기록했다.

역시 1800년대 말엽 <시의전서>에 '고음(膏飮)'이 나오는데,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고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큰 솥에 물을 많이 붓고 만화(慢火)로 푹 고아야 제 맛이 나고 진하고 뽀얗다'고 하였다.

다시마, 무, 고기를 넣어 푹 끓인 맑은 장국이 곰국이고, 설렁탕처럼 뼈와 고기를 넣고 푹 고음한 것을 곰탕이라고 한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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