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들 애환 가득 담아낸 컬컬한 영양 만점 해장국...쇠국물에 '파 송송' 식은밥 말아 '한 끼 뚝딱'

한양의 재상들이 해장국으로 효종갱(曉鍾羹)이라는 갈비와 전복이 들어간 고급 갈비탕을 즐겼듯이 곰탕이나 설렁탕, 육개장은 서민들이 즐겼던 해장국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간판이 없었던 옛날 설렁탕 집은 주로 문간에 쇠머리를 놓아두어 설렁탕 집임을 표시하고 토방 위에 소금 그릇과 파 그릇, 채반에 국수를 사려 놓았다. 우신, 우랑, 지라 등도 삶아 함께 채반에 놓아두고 선반에 뚝배기를 엎어 쌓아 놓았다.

손님이 오면 손님이 보는 앞에서 뚝배기에 식은 밥을 담고 그 위에 우신, 우랑, 지라 등을 얹어 쇠뼈 등 쇠가죽 말고는 모든 부위를 다 넣고 장시간 우려낸 뜨거운 설렁탕 국물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토렴(退鹽)을 하여 국수사리와 함께 내놓았다.

지체 높은 사대부·조정 VIP   무교탕반집 뒤채 별실 이용

곰탕집은 둥그런 사등롱(沙燈籠)과 울긋불긋한 종이쪽을 길게 늘여 나풀거리게 하여 표시하였다.

북촌(北村)인 궁궐 주변에는 지체 높은 고관들이 살았고, 남촌(南村)인 중구 남산동에서 필동을 거쳐 묵정동에 이르는 곳에는 하급 공무원이나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

북촌 사는 지체 높은 벼슬아치들은 낮에는 궁에 나가 정사(政事)를 보다가 저녁에 퇴청(退廳)하여 집에 돌아와 엽관배(獵官輩)나 식객(食客)들과 사랑방에서 밤늦도록 어울려 지내다가 출출해지면 상노(床奴)에게 사방등을 들려 곰탕집을 찾았다고 한다.

청계천 주변 돈 많은 상인이나 오입쟁이들이 드나들었다는 백목탕반집, 품계(品階)가 높은 벼슬아치가 이용하는 수표다리탕반집이 있었으며, 조정의 대감이나 남북촌 지체 높은 사대부들이 드나들었다는 무교동의 무교탕반집 등이 있었다.

특히 조정의 대감들이 자주 다니는 종로통은 서민들이 길을 가다가 대감들의 말이나 가마를 발견하면 몸을 피해 골목길을 이용했는데, 이 길이 종로 2가에 흔적이 남아 있는 피마골(避馬洞)이다. 옛날에는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피마골이 있었다.

주로 조정의 VIP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무교탕반집은 사방등을 든 고관이 들어오면 일반 손님들은 먹다 말고 자릴 피했다가 사방등대감이 나가면 다시 들어와 남은 음식을 먹었으며, 무교탕반집 뒤채 별실은 사방등대감들을 위해 준비된 VIP실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24대 헌종(憲宗·1827~1849년) 임금도 미복차림으로 이 무교탕반집을 드나들며 탕반을 즐겼다고 한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설렁탕과 곰탕은 같다?
공탕 → 곰탕·슈루 → 설렁탕    뿌리는 같은 '동류이종'

설렁탕과 곰탕에 대하여 이설(異說)도 있다.

한양대학교 고(故) 이성우(李盛雨) 교수는 '영조 44년(1768)에 지은 <몽어유해(蒙語類解)>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空湯)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역시 몽고에는 고기를 맹물에 끓인 설렁탕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몽고의 고기요리가 여말에 이 땅에 밀려들어 왔으나 공탕인들 예외일 수 없고, 이 공탕이 곰탕, [슈루]가 설렁탕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의 곰탕과 설렁탕은 동류이종(同類異種)일 따름이다. 설렁탕을 선농단에 결부시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후세의 와전인 듯하다'라고 적고 있다.

종로에 이문 설렁탕이 있다면 을지로 2가 청계천변에 이남장(대표 신영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지로 2가, 전화 (02)2267-4081) 설렁탕집이 있다. 이 집은 두 아들과 딸까지 이남장 지점을 운영할 정도로 설렁탕집의 튼튼한 기반을 마련한 집이다.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주 찾는 집이라 해서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유명했던 봉희 설렁탕(대표 백봉희 :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 35-2, 전화 (02)302-9754)집은 남북정상회담 때 북측 대표들이 그 맛을 칭찬하고 갔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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