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욕정은 일상 생활의 표출

<이방인 designtimesp=12274>의 주인공 ‘뫼르소’. 어제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었고 오늘 ‘나’는 해수욕을 한다. 바닷가에서 같은 직장의 타이피스트로 있었던 ‘마리’를 만난다. “나는 머리를 뒤로 젖혀 여자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목덜미 밑에서 마리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영화는 때때로 우습고 너무나 싱거웠다. 마리는 다리를 내 다리에 기대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같이 하룻밤을 보내고 일주일 뒤에 마리를 다시 만난다. “나는 몹시 욕정을 느꼈다. 탄력 있어 보이는 젖가슴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고 그을은 살갗이 얼굴을 꽃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마리가 다가와 물 속에서 나에게 달라붙었다. 마리는 입술을 나의 입에 갖다대었다. 잠시 동안 우리는 물결 속을 뒹굴었다. 급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우리는 곧장 침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뫼르소는 어쭙잖은 사건에 관련돼 칼을 들고 덤벼들려는 아랍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체포가 됐고, 법정에 서게 된다. 검사의 논고는 간단하다. “어머니가 숨진 다음날 가장 수치스러운 정사에 골몰하고 대수롭지도 않은 이유로 어처구니없는 풍기사건의 결말을 지으려고 계획을 세워 살인을 한 사람입니다.”
뫼르소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가령 감옥에 갇혀서도 “여자에 대한 욕정이 고통거리였다. 나는 젊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만이 아니라, 여러 인연으로 좋아해 사귀었던 그저 어떤 여자, 여러 여자들, 모든 여자들을 생각한 까닭에 나의 감방은 그들 여자들의 얼굴로 가득 들어차고, 나는 욕정으로 충만했었다.”
뫼르소에게 마리는, 하나의 생활이고 관계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검사는 뫼르소를 비난한다. 장례식을 치르는 중에 어머니를 위해 울지 않았다는 사실을 살인 그 자체보다 더 오랫동안 법정에서 재현해 보인 다음 사형을 구형한다.
뫼르소는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까 울지 않았고 어머니가 죽음 가까이에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서글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또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재판장과 배심원들은 뫼르소가 왜 그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사제는 뉘우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뫼르소는 성가실 뿐이다. 왜 꼭 이해가 돼야 하고 뉘우쳐야 하는지를 알아듣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다. 이치에 맞지 않고 부조리한 것이다.
뫼르소는 부조리한 현실에 무릎꿇어 잘못했다고 뇌까리기보다는, 사형을 집행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자기를 맞아주기를, 행복을 느끼며 소원한다. 작가 알베르 카뮈(1913~60)는 독일의 지배라는 ‘부조리한 상황’ 아래서, 조국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지하 활동을 하던 42년에 <이방인 designtimesp=12282>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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