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사대가 즐겨먹던 '찜'...서민들 다정한 술안주 '구이'

예전에 궁중이나 사대부집에서는 갈비구이보다는 주로 갈비찜이었고, 갈비구이는 1930년대 주막의 술안주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쇠갈비로 유명한 곳은 수원갈비와 예산갈비가 유명했고 이동갈비와 왕갈비로 불리는 안의 찜갈비가 있다.

불갈비의 경우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불리는데, 이동갈비는 1960년대 초 이북에서 피란 내려 온 김정민 할머니가 포천군 이동면 장암리에서 처음 시작하다가 문을 닫고 70년대 김정민 할머니 집에서 주방을 맡았던 주방 아주머니와 조카가 김정민 할머니의 손 맛을 이어 받아 장암갈비집이라는 상호로 시작했다.

몇 년 전 ‘김미자 갈비집(031-531-4459)’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김미자 갈비집은 조선간장과 조청을 넣고 끓인 후 양념에 사과나 배 등 과일을 넣어 갈비를 재워 그 맛이 독특하다.

한편 갈비와 함께 나오는 동치미의 시원한 맛은 갈비 맛을 한층 맛깔스럽게 하고 있다.

갈비의 길이가 4인치이면 수원갈비로 불리는데,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031-226-8888)’이 원조집이며, 화춘옥은 수원 팔달구에서 형 이춘명(李春明) 씨와 1930년부터 화춘제과점을 하던 이귀성(李貴成) 씨가 일본의 태평양전쟁으로 밀가루 공급이 끊기자 1945년 해방되던 해 수원 영동 시장내 싸전거리에서 27평짜리 목조 건물에서 주먹만한 소갈비를 듬뿍 넣은 해장국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며 그 맛이 장안에 소문이 나고 번창해지면서 양념갈비를 재웠다가 구워 파는 수원의 독특한 갈비를 탄생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잠시 가게 문을 닫고 부산으로 피란을 가 부산 현지 사람에게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유명해진 것이 해운대갈비이며, 이 해운대 갈비가 부산 갈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화춘옥은 전쟁 후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외상도 주고 하다보니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자 시청 공무원이었던 아들 이영근 씨가 퇴직을 하고 다시 가게를 일으켜, 60∼70년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 경기도청을 순시하려면 꼭 화춘옥에 들러 갈비와 함께 막걸리를 들고 가셔서 이 집은 수원의 갈비 명가가 된 것이다.

화춘옥에서 41년 동안 갈비를 다루었던 문이근 씨는 갈비의 대가라 할 수 있는 이원길 씨를 배출했고 이원길 씨는 갈비 조리업계의 대부로 많은 후진들을 배출했다.

해운대갈비의 경우 수원갈비의 원조인 화춘옥 사장 이귀성 씨가 갈비 재우는 방법을 전수해 주면서 한국전쟁시기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지금은 그 집이 어느 집인지 확실치 않고 다만 해운대에서 암소 갈비 맛이 좋고 약 30여 년 간 갈비집을 해 온 해운대 ‘소문난암소갈비집(051-746-0033)’이 그 명맥을 잘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수원 본갈비’ ‘명성옥’ ‘삼부자갈비집’ 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비집들이 많이 생겼으며,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성업 중에 있고, 경남 진주에는 1945년경부터 부산정육점을 하던 봉곡동 서부시장내 지금의 ‘진주냉면 본점(055-741-0525)’ ‘하대점(055-758-9077)’의 암소 한우 생갈비가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독특하다.

‘안의 대중식당(055-962-0666)’은 2대에 걸쳐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거창의 ‘별미식당’ ‘대전식당’과 함께 왕갈비찜으로 알려져 있는 별미집들을 배출했다.

/김영복(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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