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봉양위해 백정 자청...지극한 효심 천지신명 감동

함양군 안의에는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백정비석이 왕명에 의해 그 내력과 함께 세워진 곳으로 수 십 년 전에는 전국의 백정들이 이곳에 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에 쇠부리 마을이 있다. 황석산을 따라 내린 진수산(대밭산)은 제월대 밑에 마치 배추 속을 버무려 놓은 듯한 ‘김치바위’에서 마감되고 대밭산 자락에 형성된 ‘쇠부리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관북마을의 백정 비석과 함께 마치 안의 왕갈비의 내력이 담겨 있는 듯하다. 


옛날 안의현에서 과거 길을 가려면 향교 앞을 지나 비단을 펼쳐 놓은 내라 하여 붙여진 금호강(錦湖江)을 건너 교북리 관북마을(역말)을 지나야 한다.

이 관북마을에 글 공부를 하는 조귀천(趙貴千)이라는 젊은이가 노부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이 늙은 아버지는 눈먼 소경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조 효자(趙 孝子)는 앞을 못보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해 봉양을 했으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가 없게 되자 정한수를 떠 놓고 매일 같이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빌었더니, 백일이 되는 날 꿈속에 하얀 백발을 한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천일(千日)동안 소(牛)의 간(肝) 일천봉을 매일 같이 구하여 아버지에게 봉양을 하면 눈을 뜨리라!”라고 하였다.

조 효자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글 공부하던 책을 덮고 당시 천민으로 취급되던 백정을 자청하여 안의현의 토수막(안의 사람들은 도축장을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 고용살이로 들어가 매일 한 봉 씩 3년간 구백구십구봉을 봉양하였으나 아버지의 병은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 천일이 되는 날, 쇠간 한 봉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금호강이 범람하여 강 건너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조 효자는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아버지가 계시는 맞은 편 집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효심이 부족하여 폭우가 내린 듯 자책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 효자의 효심에 천지신명이 감동하였는지 갑자기 강물이 상하로 갈라지며 길이 열려 조 효자는 단숨에 집에 달려가 눈먼 아버지에게 쇠간을 봉양하니 아버지의 감겼던 눈이 뜨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신분의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조 효자가 사는 집 앞 관북 금호강가에 효자비를 세우라는 왕명(王命)으로 ‘효자백정조귀천지려(孝子白丁趙貴千之閭)’라는 전국 유일의 백정비(白丁碑) 즉 효자비(孝子碑)를 세워 효행의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고, 이 비는 지금도 관북들 금호강가에 돌보는 이 없이 외롭게 서 있다.

옛날에는 소를 잡으면 간이나 내장 등 부속물은 토수막에서 수고한 백정들에게 삯전으로 주었다.

물론 전해 내려오며 부풀려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전설과 같은 실화(實話)는 ‘안의에 오면 안의 왕갈비를 먹어야 한다’는 장맛이 맛깔스럽게 배어 있는 안의 왕갈비 맛과 함께 함양군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으나 지역에서는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안의 왕갈비는 우선 크기가 주먹만하여 보기만 해도 포만감을 느낄 정도이다.

정월 장(醬)과 엿기름으로 곤 물엿 등 갖은 양념으로 우선 갈비에 연하게 간하여 뭉근 불에 오랫동안 끓이다 표고버섯, 양파, 당근, 파 등 야채를 넣어 고명으로 색깔을 맞춘 안의왕갈비는 모양새나 맛깔스러움이 식욕을 더하게 한다.

/김영복(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