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종찰 해인총림에서 벌어진 불사(佛事)문제가 급기야 불교계 내부로까지 번져나고 있다. 네티즌들의 찬반 논쟁이 불붙으면서 이는 예견된 사태였다고 할 것이다.
해인사측이 내놓은 청동좌불 조감도를 보면 연화좌대만 해도 10m, 경주 석불사의 부처님 좌상을 그대로 앉힌 듯한 모습의 좌불 높이가 43m로 기존의 불상중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지난 4일 좌상청동대불 봉안기공식을 가지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 사업이 무엇 때문에 불가의 담장을 넘어 논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것일까. 해인사는 한국 선불교의 요람으로 그간 해인 선방이 전통으로 지킨 청정 수행도량의 풍토를 저해한다는 점이 건립 반대의 가장 큰 요인으로 떠올랐다. 더불어 지리산살리기국민행동상임대표인 실상사 수경스님이 불교전문지에 기고한 “부처님을 모시는 일보다 좋은 일이 없으며 부처님 출현은 꿈에도 그리는 우리시대 중생의 바람이지만 대중의 불신과 원망을 사는 불사는 이미 불사라 할 수 없다”는 지적처럼, 이 만한 규모라면 설령 해인사의 공력으로 건립한다해도 그것은 해인사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불교 내부적 비판 이외에도 해인사 청동불 불사에는 문화적 잣대로 들이댈 수 있는 몇가지 맹점을 갖고 있다.
그 하나가 규모 불사의 무비판적 수용이다. 지난날 한국사회는 ‘거품’으로 불리는 ‘규모의 경제’체제속에 환란의 한가운데로 떠 밀려왔다. 동시대의 행태인지 선문(禪門)의 풍토가 이를 빼닮아 버렸다. 대규모 불사가 불교진작의 명분 아래 고증이나 검증 절차를 생략한 채 청정도량을 점거하고 있는 실정에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 명승지의 사찰마다, 말사에서 본사에 이르기까지 중창(重創)을 위한 플래카드를 내걸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비구승의 공부방을 늘리고 옛 도량의 형태를 다시 찾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자칫 1500년 풍상의 국보적 종교문화재를 뒤틀리게 만들 수 있다.
중창이라는 이름으로 재건된 대웅전이나 요사채, 탑전과 대종이 과연 천년 이끼 묻은 낡은 기왓장 하나에 깃들인 문화적 장인정신으로 복원되고 있는가를 고민해볼 문제다.
더구나 한국의 전통유적은 우리의 지리와 풍수.문화적 감성이 조형화해낸 적절한 크기와 색채를 간직해왔다.
돈황석불이 장대하지만 석굴암이나 다보.석가탑의 정치한 예술과 불심을 앞 지를 수는 없다. 동남아나 인도의 현란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다기한 불교유적과 우리의 화엄사 각황전.대흥사 부조탑을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언젠가부터 우리의 사찰 불사는 세계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기 시작했다.
한때 경쟁적으로 선단경영에 나섰던 대기업 마인드로 여기저기 덩치큰 박물관과 국적불명의 불당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현장을 둘러보면‘울긋불긋’한 좌판을 보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다 보니 중창이 빚어낸 형상물 대다수에서 문화재적 장인정신을 읽어볼 수가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해인사 청동대불도 ‘이벤트를 통한 포교를 기치로 내세운 한 스님의 뜻이 강하다’는 항간의 얘기처럼 현세적 신앙욕을 발현하려 하거나 규모불사의 풍조를 따르는 또 하나의 중창불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점이 적지 않다.
수백근의 청동을 녹여 주형틀에서 대불을 생산해 낸다고 가정해본다. 에밀레종으로 더 알려진 성덕대왕 신종은 <삼국유사>를 통해 애절한 염원이 스민 신비한 종소리를 갖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종을 다시 구워내려고한 최근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 종과 그 소리를 호락호락 복원하기에는 염원이 부족했다.
이처럼 실패한 대불이 해인사에 버티고 앉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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