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이르기를 고귀한 생명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생명 즉 인권은 세상 어느 것보다 귀중하고도 고귀하다는 말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인권문제를 주요 정책의 하나로 삼아 인권법을 통과시키고 인권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이 땅 남한에서는 영호남 지역적 차별을 가리지 않은 40여개 지역에서 백만명이라는 무수한 인명이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민족공동체의 일원이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아군, 즉 국군과 경찰 및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한것에 대하여 정부는 아직 이렇다 할 입장이 없다. 저 동남아시아의 킬링필드나 동티모르 사태에서나 볼 수 있는 야만의 시대가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건만 정부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50여 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죽음과 시체를 온 적막강산에 유기하여 버려둔 채 아직도 유교적 정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이 땅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차마 있을 수 없는 거짓이자 위선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부의 인식은 반공적인 관점으로 일관해 왔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건의 일체를 좌익활동과 연계하여 거의 절대적으로 불온시 해왔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삶과 인권보다는 안정된 국가운영을 우선시 한 결과로서 당연하게 반변혁적 입장을 취해 온 형태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정부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내세우면서 일체의 비판적 반정부 반체제 활동 모두를 ‘빨갱이’ 소행으로 몰아 부치면서 틈만 나면 ‘마녀사냥’을 해왔던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단연 일등 공신은 보수 정객들과 논객들이었다. 따라서 민간인 학살의 경우에도, 좌익 및 부역 혐의와 지방 좌익의 극렬활동에 그 초점을 맞추어 선전해 온 것이다.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부의 관점이 이렇다 보니 그 피해자와 유가족은 지금까지 냉전 이데올로기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민족 구성원으로 대접도 못 받으면서 죽은 목숨처럼 살아 왔던 것이다.
남한사회에서의 빨갱이란 전근대 시절의 천형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 어떠한 처벌이나 폭력, 부녀자와 자녀들에 대한 인권 유린조차도 용납되었으며, 완전히 사회적인 매장을 해도 반발이 없었다. 이러한 저주스런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상처를 잊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고, 일본으로 밀항을 하기도 하였으며, 자녀들까지 피해를 입을까 봐 철저히 침묵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노근리 미군의 양민학살 사건이 AP 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전국의 각 지역에서 진상규명 활동이 본격화되는 이 시점에도 극소수의 유족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금까지의 이러한 초법적이고도 불법적인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정부는 사건을 최대한으로 은폐하고 축소하려고 했다. 거창양민학살, 제주4.3과 같이 극히 일부 사건의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좌익이나 좌익 혐의자 및 통비분자를 제외한 소위 양민이라는 우익측 피해만 국한하여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는 설령 피학살자가 좌익이라 하더라도 1949년의 제네바협정에 의한다면 적법한 사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형 집행은 당연히 불법적인 조치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민간인학살의 문제 해결은 실제적인 진상규명과 명예회복보다는 형식적인 위령사업과 배상이 아닌 개인적 보상에 치중하여 왔다. 결과적으로 이는 진상규명 차원이 아닌 개인적인 민원처리 수준으로 격하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야만으로 떨어뜨린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반인권적인 사례가 언급되고 있다. 이른바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폭력, 그리고 정치권력에 의해 조장된 인종분규나 종족 갈등으로 인한 대량학살들이 그것이다. 이는 어떤 경우에든 공권력에 의한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막는 일이야말로 노동인권.여성인권.소수자 인권이 보장될 수 있는 첫 걸음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 첫 걸음을 회피하고서는 모든 인권 운동이나 인권 담론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민간인학살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남한사회 인권운동의 절대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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