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세월 다 갔지”

깡통골목의 과거를 캐기 위해 기자는 한 시간째 골목을 돌고 있다. 골목 사람들은 ‘국수집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국수집을 찾았다. 띠포리(밴댕이) 국물로 유명한 ‘할매국수’(본보 2002년 10월 16일 보도)다. 며느리인 듯한 주인이 금방 아버님을 모시고 올테니 기다리란다.

   
◇ 깡통골목의 형성


멋진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 천화성(77) 할아버지. 며느리한테 미리 얘기를 들은 듯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다.

“큰 애가 지금 50대인데 여기서 다 컸습니다. 우리 할멈이 장사를 할 적에 이 곳에서 국수를 먹던 ‘주먹’들이 지금도 찾아와서 먹고 가곤 합니다. 할멈 인심이 좋았거든요.”

전쟁 중 미군부대에서 일했다는 천 할아버지는 깡통골목을 짓는 모습을 직접 지켜봤다.

“내가 미군 부대 목공 센터 조장이었습니다. 영어는 못해도 대강 알아듣고 숙소도 지어주고 그랬어요. 그 때 당시 지금 깡통골목이 있는 하천 위에다 목조 건물을 짓더라고. 그러고는 한 칸씩 임대를 주었지요.”

이렇게 만들어진 깡통골목에서는 주로 미군 군수품이 거래됐다.

   

골목과 함께 울고 웃었던 한평생

“부산 국제시장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걸로 꿀꿀이죽도 만들어 팔았습니다. 바로 이곳이 마산의 중심가였지요.”

천 할아버지는 깡통골목과 관련해 두 가지 인상 깊은 일화를 소개했다.

◇ 외교 다방의 상하이 박

현재 깡통골목 건너편엔 럭키사우나가 있다. 사우나가 들어서기 전엔 ‘럭키카바레’가 영업을 했고 그 전 이름이 ‘백옥회관’이었다. 그 당시 마산 유일의 사교장이었다. 그 바로 옆에 ‘외교다방’이 있었다. 한국 전쟁 때 인천 미인대회 출신의 마담이 연 다방이다. 그 남편이 ‘상하이 박’이란 사람이다.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기고 성격도 좋았다. 한 번은 다방에서 군인과 싸움이 붙었다. 공군점퍼를 입은 이 군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상하이 박을 향해 겨누며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상하이 박은 전혀 기죽지 않고 “야! 쏴! 쏴봐!”라고 소리쳤다. 결국 그 군인은 총을 쏘지 못했다.

“그 만큼 배짱이 있던 사람이라!”

오랜 세월만큼 사연도 각양각색

천 할아버지는 그 정도라야 험한 전쟁 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주먹’들의 패싸움

당시 깡통골목 주변으로 ‘주먹’들도 많았다. 한번은 깡통골목 부근 주먹 패 중 한명이 당시 서성동·오동동·부림동 패거리들에게 맞고 왔다. 격분한 깡통골목 패거리는 손에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가 그 쪽 대장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러고 잠시 뒤 부림동 쪽 대장이 지프차를 타고 깡통골목에 나타났다. 온 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였다. 그 뒤로 부림동 패거리 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당시 깡통골목쪽 패거리 위세가 부림동 보다는 약했다. 때문에 깡통골목 주먹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숨기에 바빴다.

“대단했지. 그렇게 맞고도 명색이 대장이라고 붕대감고 나타난 걸 보면….” 천 할아버지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겁이 난다고 했다.

천 할아버지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러다 4살 때 함경북도로 건너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는 중퇴했다.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해방을 맞았다.

그 뒤로 계속 깡통골목과 함께 늙어왔다.

“좋은 세월 다 갔지.”

이는 자신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깡통골목을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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