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병마 딛고…때론 오기로

“난 불편한 손으로 일본을 제패했다. 그런데 정상적인 몸을 가진 당신들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상에 올라설 수 있지 않은가.”  - 장훈

일본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정상에 올랐다.

▲ 장훈
한국은 일본과 세 번 붙어 두 번이나 꺾었지만 이상한 준결승 대진 방식 때문에 4강에 만족해야 했다. 일본은 1870년대에 야구가 도입됐고, 한국도 1905년에 야구가 들어와 100년이 넘는 긴 야구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은 1934년 미국팀과 친선경기를 위해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대일본도쿄야구구락부를 만들어 프로야구의 첫발을 내딛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5년뒤인 1950년 오늘날의 양대 리그 체제가 됐다. 일본은 4000여개의 고교야구팀과 6개의 돔구장을 자랑하고 있다.

일본 야구를 일찍부터 경험했던 재일동포 선수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세 명의 선수가 있다. 그들은 모두 이승엽의 현 소속팀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고, 두 선수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전기(傳記)도 3종이나 나왔고 허영만에 의해 만화로도 그려진, 원폭수첩을 갖고 있는 유일한 프로야구 선수. 일본 이름은 하리모토, 바로 장훈이다.

▲ 장 훈
1980년 5월28일 롯데 오리온즈의 장훈은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대망의 3000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한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개인통산 3000안타 돌파는 어렸을 적 입은 화상으로 오른손 두 손가락이 붙은 장애를 딛고 이뤄낸 기록이어서 더욱 놀라웠다.

 그는 고교야구 명문인 오사카 나니와상고 시절 투수 겸 4번타자로 뛰어난 선수였지만 교내 폭력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고시엔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장훈은 1958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해 투수와 외야수로 뛰며 고국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장 훈-일본야구 첫 3천안타 돌파

장훈은 비록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고교재학중에 이미 요미우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정도였다.

장훈이 졸업을 앞뒀을 때 무려 9개 구단이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했다. 도에이 플라이어즈 이와모토 감독은 히로시마에 있는 장훈의 허름한 집을 직접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등 성의있는 자세로 스카우트 작업을 펴 최후의 승자가 됐다.

1959년 2할7푼5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듬해 바로 3할을 돌파했다. 1961년에는 3할3푼6리로 생애 첫 타격왕을, 다음해에는 타율 3할3푼3리, 홈런 31개, 99타점으로 MVP에 올랐다. 그의 활약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는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다.

그가 쓴 ‘부챗살 타법'은 당시로선 장훈의 전유물이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장훈을 영입하면서 왕정치(오사다하루)와 콤비를 이룬다. 장훈은 1980년 롯데 오리온즈로 옮기며 2년간 선수생활을 더 한 뒤 은퇴했다. 생애통산 3085안타에 504홈런, 1676타점 319도루의 기록으로 1990년 일본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데 통산 타율은 3할1푼9리였다.

▲ 김일융

프로야구 삼성 팬이면 누구라도 김일융을 기억할 것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력투수로 활약하고 있던 미우라 히사우, 김일융의 일본 이름이다. 일본프로야구 13년동안 400게임에 출전해 80승 72패 36세이브 방어율 3.16을 기록했다. 방어율 1위 두차례, 승률 1위 한차례, 1978년에는 구원왕에도 올랐다.

김일융은 고시엔 대회 준우승을 이룬 투수였지만 한국 국적이란 이유로 드래프트에서는 제외됐고, 요미우리가 거액에 스카우트한다. 

김일융-한·일 양쪽 리그서 ‘호투’

국내구단 가운데 그를 영입하려고 먼저 나선 곳은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 베어스였다. 김일융은 결국 삼성행을 택했는데 당시 김일융의 몸값은 이적료를 포함해 2억원이 넘었고 아파트와 차량까지 제공됐다.

김일융은 삼미와의 1984년 시즌 개막전에서 김시진의 뒤를 이어 마무리 투수로 나왔지만 3점 홈런을 얻어맞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다. 데뷔 첫해에 16승,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했지만 삼성은 우승하지 못했다.

▲ 김일융

이듬해인 1985년 25승으로 역시 25승을 거둔 김시진과 함께 리그 최강의 좌,우 원투펀치로 이름을 날렸고 삼성은 전·후기 통합 우승이라는 위업을 이룬다.

1986년 그는 당뇨병 진단을 받지만 이 사실을 숨긴다. 13승으로 그해 시즌을 마치고 다이요 훼일스로 현금 트레이드된다.

일본프로야구 복귀 첫 해 통산 다섯 번째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고 11승 12패를 올리며 센트럴리그 컴백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일융은 역대 삼성이 보유한 외국인선수 가운데 최고의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년 한국 프로 야구사에 불멸의 3대 기록을 꼽자면 프로 원년인 1982년 백인천의 시즌 4할 타율, 박철순의 22연승, 그리고 장명부가 1983년에 기록한 30승이다.

1969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소프트방크 호크스의 전신인 난카이 호크스(1973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신인 히로시마 카프(1977년)에서 선수생활을 한 후쿠시 히로아키, 바로 장명부다.

▲ 장명부
1982년 부진의 늪에 빠져 은퇴를 생각하던 그를 한국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즈가 접근해 온다. 1983년 삼미는 1억2000만원과 주택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그를 영입한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도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큰소리 친다.

장명부-30승,국내 불멸의 기록

그 당시에는 상대팀 타자들에 대한 자료 같은 것이 없어 장명부는 스스로 타자들을 파악하며 자료를 만들어 간다.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8월에는 나흘 연속 등판하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까지 무리하게 등판한 이유는 돈이었다.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는 구단 사장의 약속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목표인 30승을 이뤄 내지만 보너스 약속은 정식 문서로 작성된 것이 아니어서 사장 사비로 약속한 금액의 일부를 주는 선에서 장명부를 달래야 했다.

시속 145km의 빠른 직구와 낙차 큰 커브 등과 능수능란한 완급조절, 타자를 향해 빈볼을 던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모습으로 그는 ‘너구리’로 불렸다.

▲ 장명부
그렇지만 그의 전성기는 단 1년이었다. 전년도에 무리한 탓에 1984년 시즌에는 13승 20패 7세이브 방어율은 3.30으로 악화됐고, 팀은 다시 꼴찌로 추락한다. 1984년 시즌 뒤 장명부는 삭감된 연봉에 계약을 하고 1985년에는 다시 28%인상된 연봉을 받지만 20승 이하일 땐 위약금을 물기로 한다.

1985년 시즌 중 팀은 청보로 넘어갔고, 청보 핀토스는 장명부를 자유계약선수로 풀어 버린다. 1986년 현 한화 이글스 전신인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을 입지만 1승 18패로 최악의 성적을 냈고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해 벌었던 돈마저 다 날려버렸다.

그 뒤 서울의 고등학교와 프로팀 투수코치를 하다 1991년 5월 마약상습복용으로 구속돼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2005년 4월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하우스 소파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

/위창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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