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무대 밴드 애환 달래던 슬프면서도 시적인 노런

도시에 해가 진다. 거리를 밝히는 네온사인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다. 술꾼들이 거리를 배회하기엔 이른 시간.

도시의 한편, ‘○○ 나이트클럽’ 간판에 불이 들어왔다.

‘나이트클럽’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중년 손님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일명 ‘회관’이라는 곳이다. 출근하는 최성호(45)씨를 만났다.

   
“마산에서 나고 자랐어요. 키보드 연주는 21살 때부터 했고요.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마산 창원의 나이트클럽은 물론이고 경남 지역 곳곳을 다녔죠.”

그는 청년 시절 전부를 음악과 함께 했다.

“크리스탈, 금문교, 골든벨, 청탑, 충무(현재의 통영)에 있었던 비치, 진주의 동방…등등 안가본 데가 없습니다. 충무에서 연주할 때는 손님으로 온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멋있었죠. 밴드 모두가 하얀 유니폼을 입고 연주를 하면 폼 좀 났죠.”

들어오면서부터 물어보고 싶어 조바심을 낸 질문이 있었다. 그래서 대뜸 물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요? 영판 우리 이야기더만요. 돈 떼먹고 밴드에서 이탈하는 이야기하며 고가의 장비를 들고 이 업소 저 업소 옮겨다니는 일은 우리도 수없이 반복했죠.”

손님이 없을 때는 무대에 올라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유명한 가수의 모창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제가 자주 불렀던 게 김현식씨의 노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김현식이 누군지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제가 한번씩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 참 좋은데 누가 부르는 노래냐고 물어오는 사람들도 있었죠. 슬프면서도 시적인 음악이 좋았습니다. 가슴에 꽂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연주도 많이 했죠.”

김현식을 알게된 계기는 서울에 있던 친구가 LP판을 테이프에 복사해서 보내오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서울로 갈 기회도 없지 않았어요. 당시 김도향씨가 운영하던 서울 스튜디오라는 곳이 있었어요. 그 곳에서 믹싱 기사로 있던 선배가 오라고 했는데 못 갔습니다. 위일청 씨가 있던 서울 패밀리 팀에서 연주하던 친구가 부른 일도 있었고요. ‘뭐 서울까지 가서 음악하냐’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음악으로 잔뼈가 굵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아침까지 음악에 대해 논쟁하는 경우가 있어요. 당시에는 악보도 제대로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의 곡을 연주하려면 테이프를 수백번도 더 듣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 파트별로 자체 악보를 만들어내죠. 그런데 지금은 어디 그렇습니까? ‘전자칩’ 하나면 모든 연주가 가능한데요. 요즘 이런 음악하는 친구들도 드물지만, 예전 같은 열정이 없는 것 같아요.”

‘○○나이트’를 나올 땐 어둠이 이미 깊었다. 지나친 상업성에 물들고 있는 ‘7080 마케팅’. 그러나 그 저변에는 감동과 열정이 분명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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