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디언을 벗삼아 애인 삼아 살아온 사람, 김흥식(63)씨. 그는 오늘도 40㎏이 훌쩍 넘는 아코디언을 메고 마산 창동의 한 술집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바람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을씨년스러운 날씨까지 더해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진다. 처량하면서도 서글픈 그래서 더욱 ‘술맛’당기게 하는 아코디언 연주가, 인심좋은 미소와 함께 그는 테이블 곳곳을 돌며 사람들의 마음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마도로스 모자 밑으로 하얀 머리칼이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는 잠시 후 피아노에서도 자유자재로 손가락을 퉁기며 냇 킹 콜의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에서 흘러간 가요까지 흐트러짐 없는 연주솜씨를 발휘한다. 그에게 건반악기란 잘 훈련된 애마처럼, 순하디 순한 아이처럼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는 그 무엇이다.



“내 고향이 평양시 중성리예요. 아버님이 왜정시대 조선악극단 단장이셨는데 어릴 적부터 공연을 따라다니며 수없이 많은 노래를 들었지요. 그 당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악기를 구입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트롬본과 피아노 연주를 기차게 하셨습니다. 옆에서 보고 들으며 자라기는 했지만 저에게도 그 끼가 흐르나 봅니다. 평생 음악만 했지만 후회가 없으니까요. 지금 아코디언으로 러시아 노래를 연주하면 고향생각도 나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1·4후퇴 때 온 가족이 남으로 내려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는 고향말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여겨지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한데는 가슴아픈 사연이 있다.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버지는 연주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스페인 기타를 들고 길거리에서 연주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소련군인이 기타를 빼앗아 갔어요. 목숨만큼 소중했던 기타를 뺏긴 아버지는 마냥 그 소련군 차를 쫓아갔죠. 그런데 소련군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큰 솥단지를 아버지를 향해 던진 거예요.”



그 후 아버지는 뇌출혈이 있었고 연주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런 자신이 처량했던지 아니면 마음껏 연주할 수 없는 세상이 괴로우셨는지 술로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 건강이 악화되자 가세도 기울었다.



1남 3녀중 장남이었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12살 때 부모를,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되어야 했다. 돈을 벌기 위해 그는 아코디언을 독학으로 배웠다. 교회에 가서 연주도 하고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사향가> <곡예사의 첫사랑> 등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연주를 하며 세상을 떠돌았다. 함경도만 빼면 이 나라에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단다.



무거운 아코디언을 들고 하루 4차례의 공연을 하면 어깨가 빠지는 듯 통증이 심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객은 어깨가 아파서 더 과장되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멋지다고 앙코르를 했고, 그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힘겹지만 음악이 있어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 그가 부산에 삶을 터전을 마련한 것은 자유당 말기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의 관사에 내려왔다는 얘기를 듣고 부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린 마음에 이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만 만나면 좋은 아코디언도 사주고 자전거도 사주실 것 같아서였다. 고향에서 더 멀어졌지만 그는 이후 운명처럼 숙명처럼 연주가 필요한 곳이라면 아코디언과 함께 어디든 돌아다녔다. 덕분에 지금 자신의 머리 속에는 2000~3000여곡의 올드 팝과 동요, 세계 각국의 악보가 그려져 있다.



부산에 있던 그가 마산에 온 것은 94년. 당시 경남에 생음악을 하는 곳이 거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라이브 문화를 만들어 보자고 아는 선·후배들과 함께 이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시도했다.



이 후 그의 생활은 바빠졌다. 자신의 노래를 듣기 위해 멀리서 와 주는 사람들이 있고, 아코디언을 배워 보겠다는 제자도 나서고, 지금은 서울에서 아코디언 전문 팀 결성에 한창이라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단다. “바쁜 게 좋지 않아요· 저는 하릴없이 몸을 놀리는 것보다 지금처럼 바쁜 게 너무 좋습니다. 몸이 성한 날까지 연주하며 지내야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이 아프다가도 연주만 하면 몸이 괜찮아지는 걸요.”

악만 하기에도 바쁜 나날이지만 그는 꼭 일주일에 한번씩 들르는 곳이 있다. 서울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노모(93)가 돌아가시기전 함께 고향에 가보기 위해 지난 해 이산가족 방문의 물꼬가 트이고부터 일주일에 한번은 빠지지 않고 들러 순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고향 땅을 밟아보는게 소원입니다. 이제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아스팔트길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래도 가봐야지요. 내 친척과 형제들이 있는 곳인데요.”



얼마 전 북한 교향악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관람을 갔었다. 어릴 적 불렀던 자신이 아는 노래만 연주해 대 무대에 아코디언을 들고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들더란다.



“<사향가>라는 노래가 있어요. 고향에서 떠나올 때 어머니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모습이 50년이 지나도 선하다 뭐 그런 내용이죠. 그런 마음을 요즘 젊은이들은 알까요· 눈물도 나고 고향 생각도 나 혼이 났습니다.”



그는 오늘도 해가 어스름지는 8시면 아코디언을 들고 연주를 시작한다. 지금은 술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주며 고향에서 너무나 먼 타향에서 연주를 하고 있지만 그의 입가에는 마치 고향 땅을 밟으며 연주하는 듯 옅은 미소가 번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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