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나를 보낸다

94년 출품된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 designtimesp=16555>에서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됐으나 표절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고 도색소설이나 남의 자서전을 써서 먹고산다. ‘나’의 소설과 같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찾아와 동거하는 ‘바지 입은 여자.’ 우여곡절 끝에 잘 생긴 엉덩이를 무기 삼아 스타로 떠오른다.

‘나’의 친구 ‘은행원’은 발기불능 상황에서 지내다 ‘나’와 ‘바지 입은 여자’ 등의 이야기를 글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발기불능에서 벗어난다. ‘나’는 ‘바지 입은 여자’의 운전기사가 되어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고.

영화 중반부쯤, ‘바지 입은 여자’와 ‘은행원’이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간직하게 된 가장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나씩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은행원.’ “자취를 하던 고교 시절, 옆방에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날마다 남자가 여자를 때려 무척 안쓰러웠죠. 연민이 애정으로 바뀌어 연애편지를 보낼 정도였는데, 심하게 맞은 어느 날 여자가 내 방으로 왔어요. 몸의 상처 때문에 살짝 닿아도 민감하게 반응했지요. 그 뒤로 성병을 심하게 앓았고 발기불능이 돼 버렸어요.”

‘바지 입은 여자.’ “치마를 입고 싶은데도 공장 생활 때문에 바지밖에 못 입는 상황을 시로 써 시화전에 낸 적이 있었어요. 한 대학생이 노동자의 실태를 잘 나타낸 작품이라는 바람에 동거를 하게 됐지요. 데모가 있던 어느 날, 최루가스 때문에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고 있는데 뒤에서 바지를 벗기고 마구 해대기 시작했어요. 남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파쇼에게 죽음을, 미제에게 철퇴를!’, ‘미제 축출, 파쇼 타도!’라고 읊조렸지요. 나는 파쇼도 아니고 미제도 아니라고 소리쳤죠. 그 뒤 거식증에 걸렸고, 남자의 아버지는 치료비를 대줄 테니 헤어지라고 했어요.”

‘은행원’의 이야기는 생각(이념)만 갖고 있는 철부지가 현실에 부딪혀 꺾여버리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바지 입은 여자’의 경우는 어떨까. 80년대는 모든 것이 ‘정권’이나 ‘이념’의 문제로 수렴됐다. 모든 운동은 정치투쟁으로 발전돼야만 했고, 대중의 자율성이나 운동의 다양성은 상황 논리에 밀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90년대, 특히 93년 김영삼 정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적어도 노동운동을 제외한 영역에서는, 자율성과 다양성이 아니고서는 사람이 모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바뀌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designtimesp=16570>는 현실을 따라 잡지 못하는 운동 또는 꿈에 대한 풍자다. 이 가운데 ‘바지 입은 여자’가 거식증에 걸리는 장면은, 대학생으로 상징되는 당위와 이념에 억눌린 노동자의 모습이요, 90년대가 비웃는 80년대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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