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빈 진주 제일여고1

요즘엔 노랗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면서 가을이라는 생각을 할 기회는 없어졌다. 다만 길가에 드문드문 심어져 있는 단풍잎의 색채가 변한 것을 알아차린다거나, 또는 길가에 뭉텅뭉텅 피어있는 코스모스 정도나 봐야 가을인 것을 알아차리곤 한다. 초등학교는 항상 가는 길이 논이고 밭이었지만, 지금은 고등학교이고 게다가 이사까지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을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싫어하기도 한다. 꽃이 많은 건 좋지만 꽃가루는 싫고, 낙엽 밟는 소리가 좋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쓸쓸해서 싫다. 추석의 북적거림이 좋지만 그 후에 밀려오는 휑함과 허무감도 싫다.

하지만 난 가을의 화려함을 매우 사랑한다. 내 발 밑에서부터 무릎 또는 가슴팍 만한 게 자라 피어있는, 우리가 흔히 계란 꽃이라 부르는 흰 잎사귀에 노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꼭 어린 요정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 양으로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이며, 온 전신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여린 계집의 몸과 얼굴을, 그리고 바람 따라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팔랑거리는 모습까지 꼭 닮은 코스모스까지 모두 내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계란 꽃과 같이 엄지손가락 끝만한 올망졸망한 꽃을 달고 있는 들국화는 특별히 가을이 가면 아쉬운 꽃이 된다. 소담스럽게 핀 들국화며 그 외 늦가을에 피는 꽃들은 가을 아침에 내리는 모진 서리를 이겨내고 핀 꽃이라 더 눈부시다.

가을은 가끔 누군가에겐 겨울보다 시린 계절이 되기도 하고, 수확이 주는 만족과 풍요로움의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의 계절이 되기도 하고, 겨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설렘의 계절이기도 하다. 겨울을 준비하는 동물들에게는 준비의 계절이고, 나무에게는 자신의 잎을 떨어뜨리는 칼의 계절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익숙한 가을의 얼굴이라면 활동적인 면이라고나 할까.

여름 방학을 끝내고 점점 매미소리도 잦아들어 가면 우리는 운동회 연습을 시작한다. 장장 몇 주나 걸리는 연습단계를 거치고, 리허설까지 하는 절차는 여느 연극무대나 뮤지컬 무대의 절차와도 비슷하다.

운동회 연습을 준비하는 때가 되면 해년 해마다 피부를 꿰뚫고 운동장을 달구는 햇볕이 내리쬐어 얼마나 더우며 그을린 피부는 얼마나 아픈지. 처음 운동회를 위해 연습한다는 그 기대감과 불타는 의지도 뜨거운 태양 앞에선 꽤나 여러 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슴속에 설렘을 안고 부모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내가 패배의 쓴 맛을 많이 본 운동회는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 아니었을까. 난 그야말로 짜리몽땅한 단신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꽤나 달리기를 잘 했다. 뭐랄까, 다부진 면이 있다고나 할까. 엄마는 항상 운동회를 갔다 오신 후엔 항상 내가 달리기하는 모습을 보면 “굴러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만큼 경쟁심이 심하기도 했었고 잘 하려는 의지가 대단했었다.

유난히도 햇볕은 강렬하고, 살랑한 미풍은 머릿결을 쓸어내고 그동안 자박자박 옷을 적신 땀도 충분히 말릴 만큼 부드럽고 조금은 건조했었다. 그 날의 달리기는 조금 더 특별했다. 줄넘기달리기를 했기 때문이다. 줄넘기는 못하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자신감과 기대감으로 가슴은 부풀어 있었다. 조금씩 땀이 배어나는 미끄러운 손바닥으로 줄넘기 줄을 잡을 힘은 충만했고, 줄넘기의 길이도 알맞았다. 옆에서 날 응원하고 계시는 엄마께도 잘할 수 있다는 투지의 눈빛을 보여주었고, 가다가 넘어지지 않게 운동화 끈도 단단히 조여 맸다.

출발선에 섰다. 우리 조에서 키가 가장 작다는 장점을 이용해 최대한 안쪽 트랙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선생님은 손은 신호를 울리는 화약총 배의 매끄러운 부분을 쥐고 있으면서 손가락을 걸고 있는 총을 머리위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었다.

“준비, 퓌흉~”

아 이게 웬일인가. 불발이다. 웬일인지 제대로 발사되지도 않은 화약총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발사된 총소리를 듣고 시작했다. 난 항상 스타트가 늦기 때문에 스타트를 한 후 누군가를 따라잡아야만 한다. 5명 중 4등으로 시작을 했다. 보폭이 좁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다리를 놀려야 했다.

나와 경기를 하고 있는 몇몇 아이들을 뺀 모든 배경들은 아이들과 나를 중심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런데 줄넘기 때문일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줄넘기를 가진 채 아이들과 몸싸움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웬일인지 입에선 비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 했다.

마음속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힘껏 달음박질했다. 운동장을 절반정도 돌았을까. 그 날은 유난히도 발이 미끄러웠다.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고 했던가. 그 좋은 가을볕에 몇날 며칠동안 건조해진 동글동글한 모래알들이 모조리 내 발 밑으로 모여 날 미끄럽게 만드는 것 같아 헛발질을 하기를 꽤 여러 번. 결승점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 마음에 조바심이라는 놈이 살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경기가 아니었다. 마음을 따라 팔과 다리는 더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스팟?. 넘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발을 걸어 넘어지게 한 것이 틀림이 없었다. 팔꿈치와 무릎에선 따끔한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전해져 왔고, 입에는 모래가 그득그득하게 차인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아이들이 결승점을 통과해가고 있었다. 줄넘기는 내 손을 벗어나 저 멀리에 던져져 있었다.

꼴등을 했다는 패배의 아픔보다는 당시에 넘어졌다는 쪽팔림이 너무 컸다. 왼쪽 무릎과 왼쪽 팔꿈치 그리고 오른쪽 손바닥에는 선홍색 피가 흐르고 있었고, 얼굴은 모래가 눌린 자국이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줄넘기를 주울 생각도, 얼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래를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겨우 일어섰는데 설상가상으로 코에서 피 한줄기까지 인중을 타고 내려와 입술로 들어갔다. 아 비릿한 피 비린내와 강렬한 햇볕은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한 발을 절뚝거리면서 양호선생님께 겨우 가 상처에 소독을 대충 하고 천막 아래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아줌마들이 달리기를 하는데 엄마가 달리고 있었다. 딸은 이렇게 아파 있는데 엄마는 웃으면서 달리고 있었다. 왠지 서러운 마음에 엄마를 원망했다. 내가 넘어진 건 엄마가 열심히 나를 응원해 주지 않았고 나를 봐 주지 않았다는 마음으로 억지를 썼었다.

아무도 크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어쩌면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되는 일을 왜 애써 드러내느냐 하면, 이건 언제까지나 내 자만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이제야 인정하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내 마음은 자신감에서 그쳐야 했다.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내 마음이 오만방자하게 커져 달리기를 잘한다는 말도 안되는 착각과 자만을 불러일으킨 것이었고, 넘어질 당시에도 아무도 나에게 발을 걸지 않았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난 그랬다고 믿고 싶었고 스스로 다독거리고 싶어서 그랬음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종종 나와 같은 실수를 하곤 한다. 자신의 생각과 희망을 곧 자신의 능력이라 믿어버리거나, 주위의 소소한 칭찬도 너무 크게 받아들여 오만해져 결국 비극을 맞게 되는 이야기 말이다.

이런 예들은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베를 잘 짠다고 하여 아테나 여신에게 도전하여 결국엔 거미가 되어 거미줄을 뽑는 비극의 운명에 처한 아라크네, 태양신을 아버지로 둔 채 자신이 태양신이라 착각하여 태양마차를 몰아 결국엔 제우스의 벼락에 맞아 죽은 파에톤, 밀랍 날개를 달고 날다 자신이 새라도 되는 양 높은 비상을 꿈꾸다 떨어진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신화들이다. 이런 인물들의 행동은 신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 도전이 목숨을 빼앗거나 그보다 더한 신세가 되어버린 비극의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이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자만과 오만의 위험함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미래가 다르고 결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난 세상에서 최고란 없다고 생각한다. 최고란 말은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다. 사람마다 가장 좋아하거나 최고라고 여기는 가수 혹은 연예인, 색, 작가, 책, 노래 등등 수많은 것이 다른 것은 최고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주관성 때문이다. 내가 앞일을 살아가며 오만해지지 않을 거라는 약속은 할 수도 없고, 설령 한다해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아무나 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일부러 자만하거나 오만해질 필요는 없다. 그것들이 나에게 꿀 발린 독약 항아리와 같이 달콤함을 주지만 더 큰 쓴맛과 대가를 바란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을 항상 조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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