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삶 속에서 행복의 길을 묻다

미당으로부터 ‘한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시인’이라고 불렸던 한국의 서정시인 ‘박재삼’을 기리는 제8회 박재삼 문학제가 14일 오후 7시 사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정동주씨가 ‘박재삼의 문학과 삶’을 주제로 강연하고 지상강연으로 정삼조 박재삼기념사업회 회장이 ‘박재삼 시의 전통성’, 김인환 고려대 교수가 ‘한국시 속의 박재삼 시’를 싣고, 시인 배한봉씨가 ‘우리시사의 큰 별 박재삼, 그 푸른 슬픔의 미학’이라는 기고를 통해 박재삼 시인을 회상했다.

▲ ‘박재삼의 문학과 삶’ 주제 강연을 하고 있는 정동주 시인.
박재삼 문학제는 올해로 8회째를 맞았지만 ‘박재삼’이라는 이름은 아직 낯설게만 들린다.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을 생전에 남기며 삶의 대표적 모습인 빈부의 문제를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정서로 노래한 박재삼.

그는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1936년 가족들과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와서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날품을 팔았고 어머니는 생선 장사를 했다.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선반에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 커녕/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같은 어린 것들이/방 안에 제 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후략)(<어떤 귀로> 중에서)’

밥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던 박재삼은 수남국민학교(현 삼천포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3000원이 없어서 진학을 못하고 신문배달을 하다 삼천포 여중에 사환으로 들어갔다.

   
하루는 수업 시작종을 치고 난 뒤 교실 유리창에 붙어 영어 선생님의 강의를 정신 없이 듣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교장 선생님이 물었다. “니도 영어 공부 하고 싶나?” “예!” “그라모, 종을 친 뒤 빨리 교실 뒤로 들어가 공부하고 끝나기 전에 퍼뜩 나와서 종을 치거라.”

여중생들의 뒷자리에 앉아 영어공부를 하는 열성에 감동한 그 교장의 도움으로 1947년 열다섯 살에 삼천포 중학 병설 야간중학교에 입학해 꿈에 그리던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2학년때 국어 교사였던 초정 김상옥을 만나게 된다.

박재삼 시인의 아들 박상하씨는 기념사업회가 펴낸 박재삼 시선집에서 ‘아버지 박재삼’을 이렇게 추억한다.

“약주를 너무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얼큰하게 취하신 날이면 ‘내가 야간 중학교에서 톱이었다. 아직도 그 톱을 못깬다’하시곤 십팔번이신 <홍도야 우지마라>를 잊지 않고 부르셨다. 술 좀 적게 드시라는 우리들의 말은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아 그러기에 미안 미안해’하는 윤항기의 노랫말로 받아넘기곤 하셨던 참으로 순수한 분이셨다.”

박재삼의 시는 정치 사회적인 시사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정동주씨는 “박재삼은 언쟁을 싫어하고 작품을 통해 논쟁하는 것을 피했다”며 “이는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표현하지 않은 것일 뿐으로 박재삼은 그 나름대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고 말했다.

당시 삼천포는 ‘한국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불릴 만큼 사회주의적 열정을 가진 천재가 많았고 한국전 때 경상남도 인민위원회 청년분과책임자를 지낸 이종수씨 등은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부조리를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장섰다.

박재삼은 이종수씨와 친하게 지냈지만 북한에서 처형당한 이종수씨와는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완전히 달랐다.

정동주씨는 “박재삼 생전에 이종수씨에 대해 물어보니 ‘참 청년의 심정에서 볼 때 대단한 영웅 같았어요. 나는요, 겁이 나서 그쪽을 못갔어요’라고 대답했다”며 “하지만 청년시절 이러한 삼천포의 환경 속에서 산 박재삼이 시를 통해 추구한 것도 자신처럼 끼니를 못잇는 사람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던 만큼 방법이 달랐을 뿐 같은 것을 추구하며 나름대로 시대의 고통을 극복해냈다”고 설명했다.

한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일대기를 목월과 함께 쓴 일로 인해 반 정부적 문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지어미를 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애틋하게 생각하기 때문으로 그는 심성이 여리고 착했으나 결코 권력에 빌붙어 아부할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고 배한봉씨는 기고문에 표현했다.

정동주씨도 “그 일로 나와도 사이가 틀어졌는데 어느날 왜 그러셨습니까 라고 물어보니 ‘어쩔 수 없었소’ 한마디 뿐 다른 말은 없었다”며 “박재삼에 대해 ‘사람 좋은 박재삼’이라고 핀잔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시가 지닌 언어로서의 진정성이 사회적·역사적 바탕 위에서 어떻게 표출된 것인지 제대로 살피지 못한 불성실한 비평”이라고 성토했다.

“박재삼은 작품을 통해 논쟁하는 것을 피했다. 이는 논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표현하지 않은 것일 뿐으로…그가 시를 통해 추구한 것이 평등한 세상이었던 만큼 방법이 달랐을 뿐 같은 것을 추구하며 나름대로 시대의 고통을 극복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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