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순 창원대 교수 ‘시조문학 어울림 한마당’ 서 특강

‘백범 김구는 이순신처럼 살고싶어 했다.’

지난 8일 <서정과 현실>이 진해 경남문학관에서 마련한 ‘시조문학 어울림 한마당’에서 창원대 도진순 교수는 ‘충무공, 백범의 시와 역사와의 대면-휘호로 본 백범, 그 삶의 궤적과 진수’를 주제로 문학특강을 했다.

▲ 지난 8일 <서정과 현실>이 마련한 ‘시조문학 어울림 한마당’ 에서 강연을 한 도진순 창원대 교수. /이원정 기자
이 특강에서 도교수는 백범 김구가 남긴 휘호 중 당시 정치 정세를 강하게 함축하고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강연했다.

“백범 김구는 남이의 시로 젊은이들의 패기를 촉구하면서 이순신의 믿음으로 임시정부를 고수하고 반일독립운동을 촉구했습니다. 이순신을 존경했던 백범은 이순신이 남긴 글들을 휘호로 남기며 임시정부 고수를 다짐하고 해방 이후에는 반탁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백범은 1935년 임시정부에 복귀해 이를 주도하면서 당시 김원봉을 중심으로 대두된 유일당운동에 강경하게 맞서 나갔다. 즉 그는 ‘한 이불 속에서 딴 꿈을 꾸는 통일운동에 참가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임정을 고수했다.

1936년 회갑을 맞은 백범은 애국명장 이순신의 시 <陣中吟(진중음)>으로 심경을 토로했다.

‘誓海魚龍動(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盟山草木知(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 이는 이순신이 그의 큰 칼에 새겼던 유명한 구절로 백의종군한 그가 현실의 평가를 넘어서 역사는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목숨 걸고 다짐한 것이다.

백범은 이를 통해 임정 고수를 다짐했으며, 해방 직후에도 이 구절을 즐겨 인용하며 임시 정부의 틀을 넘는 민족운동의 대동적 단결이나 좌우합작보다는 임정에 각별한 집착을 이순신의 믿음으로 노래했다.

1947년 해방 2주년을 맞아 진해의 해군통제부를 방문한 백범은 좋아하던 ‘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를 휘호로 남겼는데, 이는 백범의 휘호라는 이유만으로 이승만 정권기에 수난을 당했다.

당시 이 휘호는 해군통제부 동문 앞에 아홉자 세치의 비석으로 세워졌지만 김구 암살 후 이승만 정권의 ‘김구 말살 정책’에 따라 6·25전에 훼손당하고 비석이 철거됐다.

진해에 휘호비를 다시 바로 세운 것은 이승만 동상을 남산에서 끌어내린 4·19였으며, 이 비석은 현재 진해시 남원로터리에 있다.

임정 고수의 노력이 미군정과 우익에 의해 좌절된 후 백범은 민족이란 시야로 남북의 통일과 화합을 위해 매진했고, 그 심정을 때로는 서산대사의 선시로, 때로는 정몽주·성삼문 등으로 노래했으며,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교수는 우리에게 백범은 아직도 한계점이 노정된 우익적 모습으로 남아 때로는 분단을 정당화하고, 그 생애의 총귀결이자 죽음의 원인, 민족으로 시야가 확대된 통일운동기의 모습은 유실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또 이것을 바로 세우지 않는 한 백범에 대한 추모는 허위적인 것이며 백범을 다시 죽이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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