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 거치며 박제위한 사냥·산업화가 멸종 초래

68년 5월 30일 천연기념물 제198호로 지정된 따오기. 키가 76cm 정도고 날개를 쫙 폈을 때 좌우 길이가 140cm 가량으로 딱 보기 좋을 만큼 하얀 바탕에 분홍빛이 비치는 새다.

동아시아가 원산지인 이 새는 알려진대로 19세기 말 갑작스레 줄기 시작했고 50~60년대에 아주 보기 드물게 됐으며 70년대에는 나라에 따라 이미 멸종됐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6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조류보호회의(ICBP)에서 국제 보호대상 조류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98년에는 국제자연보호연맹(IUCN)의 멸종위기종 적색리스트(redlist)에 ‘각별하게 위기에 처한 종’으로 등재됐던 것이다.

사람사는 물가 · 초원서 서식해 주민 ‘공존의식’ 가장 중요

◇인간 탐욕 때문에 사라진 따오기

이렇게 된 데에는 따오기가 백로 같은 새보다 행동이 느린 편이고 경계심이 강하기는 하나 농촌 마을에서 사람과 어울려 살아왔다는 까닭이 크게 작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이 보기 좋은 새를 박제로 만들어 집안에서 두고 보려고 사냥감으로 삼았다.

이를 보면 인간의 탐욕이 따오기를 멸종에 이르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포술이 이전부터 발달했다고는 하나 연속 발사가 가능한 총이 폭넓게 보급된 시기가 바로 19세기 후반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행동이 느려 경쟁 상대인 황새과의 다른 새들보다 먹이 구하기에서 처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는데 20세기 중반부터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는 농업이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먹이를 풍족하게 먹지 못하게 됐다.

또 세계 각지에서 ‘물질적 풍요를 위한’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논이나 습지 같이 먹이를 얻을 수 있는 터전도 빠르게 망가졌고 그만큼 생존 조건이 더욱 나빠졌다는 얘기다.

③샨시성 양시엔현 따오기 사육센터 부근에서 물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
◇우리나라와 일본·중국 모두 50~60년대 멸종 위기 빠져


이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를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요의 노랫말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로 흔한 철새였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말 이미 서울 북부 지역에서 따오기 50마리가 관찰돼 보고됐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1954년 1월 남대문시장에서 따오기 표본 1점이 발견됐으며 66년 2월 경기도 문산 비무장지대에 따오기가 나타난 적이 있었고 그 뒤 줄곧 기록이 없었다. 다시 따오기가 목격된 때는 74년 12월로 같은 장소에서 네 마리가 나타났었으나 1979년 1월 한 마리가 보인 다음 80년부터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철새인 따오기는 일본에서는 텃새로 자리잡았는데 한 때는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하늘을 뒤덮을 만큼 흔했다지만 19세기 말 깃털 사용과 박제 제작을 위한 남획과 서식지 파괴를 동반한 무분별한 개발로 크게 줄어들었다.

②따오기가 먹이를 얻는 이 강은 양시엔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한편에는 화물차가 모래를 실어나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소가 노닐고 있다. 따오기를 비롯한 새들과 사람들, 그리고 강물과 나무들이 아직은 조화를 잃지 않고 있다.
따오기의 학명 Nipponia nippon은 19세기 초 유럽학회에 처음 소개된 따오기가 일본산이어서 붙었으나 이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따오기가 멸종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에도 시대에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商館)에 의사로 일하던 독일인 시볼트가 수집한 따오기 표본이 1835년 Ibis nippon이라는 학명으로 세계에 소개됐다. 이를 바탕 삼아 일본조류학회는 1922년 ‘일본 조류 목록’을 통해 학명 Nipponia nippon을 발표해 정착됐고 60년 도쿄 국제조류보호회의에서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크게 알려졌다.

30년대 초반 이시카와현 노토와 니가타현 사도(佐渡)섬에 따오기 65~120마리가 살고 있었으며 52년 국가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에 들어갔다. 하지만 60년대부터 사로잡아 기르던 야생 따오기 여섯 마리 가운데 마지막 명맥을 잇던 ‘킨’이 2003년 10월 숨을 거둠으로써 일본 토종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중국에서도 1930년대까지만 해도 14개 지역에서 따오기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혀 귀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50년대 후반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해 60년에는 서식지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보고가 제출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78년 중국과학원 동물과학연구소에 따오기 연구를 위한 특별 부서를 만들었고 마침내 81년 5월 야생 따오기 일곱 마리를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으나 이 따오기 가운데 세 마리는 병이 들었거나 생식 능력을 잃은 상태였다.

   
 
 
◇복원된 따오기 서식지는 인간과 자연 공존의 상징


중국의 따오기 복원 전문가 시용메이 박사에 따르면 81년 발견 당시 따오기와 따오기 사이 가장 가까운 둥지가 7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올 봄철 따오기 번식지에서 둥지 거리를 쟀을 때는 그 거리가 500m 정도로 좁혀져 있었다.

이를 두고 시 박사는 24년 전에는 서식 환경이 지금보다 안 좋아 반경 7km 정도 돌아다녀야 목숨을 부지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필요한 먹이를 얻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상대적으로 나아져 반경 500m만 해도 먹이가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세월 동안 번식지인 산림을 꾸준히 보호 관리하고 주변 농민들과 협약을 통해 농약을 안쓰고 친환경농업을 하는 대신 생활 지원과 보상을 해주는 한편 겨울철 휴경하는 논에는 물을 채워 먹이가 되는 미꾸라지 등을 끊이지 않게 제공한 덕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와 함께 따오기가 살고 있는 샨시성 양시엔현에 철 따라 넘쳐흘러 곤충이나 개구리 작은 물고기 같은 따오기 먹이가 풍부한 개울과 강 저수지가 갖춰져 있다는 자연 조건도 작지 않게 작용한다고 시 박사는 덧붙였다.

시 박사는 자신의 논문 ‘중국에서 따오기 보전과 복원에 관한 전망’에서 “따오기는 대체로 탁 트인 물가나 초원 지대에서 사는데 이 곳은 기름지며 대체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다. 따라서 따오기 보호를 위해서는 지역 주민들의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①샨시따오기보호관찰센터 장야오밍 업무과장이 양시엔현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가에서 따오기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있다.
그러면서 시 박사는 “효과적인 협력을 확보하려면 농민들에게 일정하게 금전 보상을 할 필요가 있고 길게 봐서는 따오기의 보호와 농업생산의 지속가능한 공존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말하자면 중국에서 복원되고 있는 따오기 서식지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상징하는 표지이며, 이를 위해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치는 농업이 아닌 ‘생태적인 농업 시스템’이 반드시 강구돼 따오기도 보호하고 주민 생활도 끌어올리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