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한가위가 다가오면 한 달 남짓 전부터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 한가위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면서 마음이 설레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아니면 먹기 어려운 과일과 육고기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맛만 볼 수 있을 뿐이었지만…….

   
사십 년 전인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까닭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사상에 올리기 전에 사과와 배 윗부분을 조금 깎아서 올려놓습니다. 세 살 아래인 아우랑 나는 아버지가 깎은 사과와 배 껍질을 서로 먹기 위해 다투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질긴 사과와 배 껍질을 무슨 맛으로 먹었을까 싶지만, 그 ‘깊은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2005년 한가위를 앞둔 지금은 돈만 있으면 무슨 과일이든지 다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세상이 바뀌어, 사과와 배 껍질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아이도 없습니다. 그 만큼 과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농약과 방부제 투성이 수입 과일도 시장에 쫙 깔려 있으니까요. 황금보다 귀한 논밭에 ‘돈이 된다’는 까닭으로 온통 사과와 배, 감 따위를 심었으니 어찌 과일이 넘쳐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농부들이 황금보다 소중한 논밭을 없애고 과일을 심고 심어서 싶었겠습니까? 도시 생활인들이 날이 갈수록 밥을 적게 먹고 과일과 육고기 따위를 많이 먹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살아남기 위해) 과일농사와 축산업을 하는 것입니다.

무늬만 ‘유기농산물’ 난립

수십 년 동안, 이 나라 온 산과 들에 과일나무를 심었더니 이름도 알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병들이 생겨 독한 농약을 쓰지 않으면 거의 수확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시 사람들한테 팔기 위해, 도시 사람들이 원하는 빛깔과 크기를 만들기 위해,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도 농부들은 수십 수백 가지 독한 농약을 골라가면서 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농부들이라고 농약이 좋아서 뿌리겠습니까? 조금 크기가 작고, 못생기고, 빛깔이 좋지 않으면 중간상인이나 도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에, 하늘과 땅과 나무와 사람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한테 죄를 짓는 줄 어느 누구보다 잘 알면서 뿌리고 또 뿌리는 것입니다.

누가 먹든 말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마구 농약을 뿌린 농산물(더구나 수입 농산물)을 우리가 자꾸 먹게 되면, 농약을 치는 농부가 자꾸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농약을 적게 치거나 안친 농산물을 우리가 먹게 되면 농약을 치지 않고 농사짓는 농부가 자꾸 늘어날 것입니다. 우리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주는 안전한 먹을거리로 아무 걱정 없이 밥상을 차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만이라도 다가오는 한가위 상에는 제발 건강하고 안전한 우리 농산물을 차려 놓고 차례를 지내도록 합시다.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 그것이 하늘과 땅과 나무와 사람과 모든 살아있는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 한가윗날은 우리밀가루로 부침을 만들고, 우리밀 튀김가루로 튀김을 하고, 정성들여 지은 농약 안친 햅쌀로 밥을 짓고, 우리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와 우리 산골마을에서 기른 고사리와 도라지와 곶감과 농약 적게 친 과일로 차례상을 차립시다. 제발 방부제 투성이 수입 바나나와 수입 소고기와 수입 곶감 따위로 차례상을 차리지 맙시다.

사람들이 제게 “어디 가면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우리 농산물을 살 수 있느냐?”고 물으면 “생산자가 누군지, 어떤 방법과 어떤 마음으로 농사를 지었는지,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쳤다면 몇 번이나 쳤는지,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곳에서 사면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런 살아있는 정신으로 일하는 생활협동조합에 가면 우리 식구들이 먹는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농사지은 먹을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밀로 만든 국수와 빵, 라면, 쿠키, 과자들도 있습니다. 비록 농약 친 일반 농산물보다 못생기고 빛깔도 좋지 않지만 믿고 드실 수 있는 농산물이 있습니다.

우리 농산물로 차례상 차리자

요즘 웰빙이니 뭐니 따위가 우리나라에 ‘상륙’하고부터 유기농산물 판매장이라고 간판을 붙여 놓은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간판만 유기농산물이지 진짜 유기농산물은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누가 생산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오직 돈벌이에 눈이 먼 유기농산물 판매장이 우리나라 곳곳에 생겨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만이라도 제발 부탁드립니다. 올 한가윗날만이라도 조상님께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 농민이, 우리 땅에서 지은, 우리 농산물로 차례를 지냅시다. 차례상을 보러 갈 때도 온 식구들이 함께 갑시다.

아이들 손을 잡고 수입 농산물과 우리 농산물을 견주어 보면서 삽시다. 조상님께 부끄럽지 않은 차례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이만한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정홍(시인·한국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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