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전후로 한 여성운동의 발전은 그동안 억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던 여성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의 여성들은 노동시장을 비롯해 다양한 공적영역에서 차별적 상황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여성운동의 긍정적 효과는 새로운 사회질서 구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성과 폭력성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며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를 해체하고 진정한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남성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교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잘못 형성된 남성성, 남성다움(masculinity)에 대한 제문제에 대해 남성들 스스로가 성찰적 사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인식구조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남성학(Men’s study)의 태동은 다행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의 긍정적 효과

서구자본주의는 가부장적 기획(patriachal project)에 토대를 두고 있다. 국민국가 형성의 한 축을 담당했던 병역제도(징병제) 역시 ‘군사화된 남성영웅’과 ‘민족담론’이 절묘하게 결합하면서 남성은 전투적이고 ‘민족적인 페니스’로, 여성은 출산과 가정을 지키는 ‘민족자궁’의 이미지를 생산해냈다. 군사주의 문화가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군대는 왜곡된 남성성을 체험하는 ‘학교’의 역할을 담당한다.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은 한국사회의 ‘마초(macho)적’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분명한 것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의 역할모델은 ‘치사적 역할(lethal role)’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의 사망률이 높고 수명이 여성에 비해 낮은 것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남자로 사회화되고 남성다움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왜곡된 남성다움을 내면화한 남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자기파괴적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경우 만 15세가 넘으면 남성 사망률은 여성에 비해 2배, 40대는 3배에 달하며,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의 2배에 이른다고 한다. 외국의 조사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이 각종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여성보다 4배 높고, 폭행으로 처벌받은 사람의 90%가 남자이며 폭행희생자 역시 70%가 남자라고 한다.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들도 90%가 남자이고 12~60세에 이르는 남자들의 주요 사망원인은 자살로 나타났다. 남성다움을 사회적으로 강요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심각히 훼손된 결과이다. 이 허구적인 남성 정체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여성해방, 남성해방 나아가 인간해방의 인류 목표는 달성되기 힘들다. 성별이원체계는 사실상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자율적인 삶의 억압하는 구조적 억압이다.

한국에서도 IMF 경제위기 이후 ‘남성 위기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회자되었다. 물론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강요되었던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이 강제적으로 포기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한동안 유행어처럼 번졌던 한 카드회사의 ‘아빠 힘내세요’라는 광고문구는 많은 아버지들에게 ‘처절한 책임의식’을 되새겨주는 역할을 훌륭히 담당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들은 벼랑 끝으로 몰리기 일쑤다. 생계부양자의 역할에 실패한 남성들이 선택한 최악의 방법은 ‘가족 동반 자살’이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적 성격이 더 짙다.

고전사회학자인 뒤르켐(E. Durkheim)이 이미 오래 전에 설명했듯이,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다. 따라서 접근방법 역시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옳다. 사회적 의미에서 이와 같은 자살은 ‘가부장적 자살(살인)’로 명명될 수 있다.

개인의 자살은 사회적 현상

가부장적 사회질서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여성운동의 발전과 동시에 새로운 ‘남성운동’(Men’s Movement)이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남성다움의 강요가 초래하는 소외, 억압, 파괴, 획일성, 폭력성은 더 이상 묵과할 사안이 아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우리의 자유의지를 구속하고 왜곡시키는 가부장제적 사회질서 속에서의 성역할 기대를 창조적으로 해체하고 자율적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만이 여성과 남성의 해방, 그리고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이 현실화될 것이다.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경쟁, 탐욕, 권력, 소유, 물질 등의 가치를 넘어 진정한 양성평등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성운동과 남성운동의 아름다운 만남이 필수적이다.

/백두주(경남대 강의전담교수·사회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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