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제도와 복지시설이 많다고 진정으로 복지적인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인 복지시설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은 말이 좋아 복지시설이지 사실은 격리수용소이고 하나의 감금소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머리 하얗게 세고 얼굴 쭈그러진 노인들끼리 갈 곳 없이 하루 종일 부딪치며 사는 노인시설 안의 삶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상대로부터 매순간 확인하는 끔찍한 감옥이었으면 이었지 결코 복지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 자화상을 타인으로부터 매순간 확인 받는 다른 장애인들의 시설도 마찬가지다. 그런 시설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히려 반복지적이 될 것이다.

복지시설 많다고 복지국가냐

진정한 복지사회는 수용시설이 좋고 복지제도가 좋은 사회가 아니다. 한살 어린이로부터 100살의 노인들까지,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모자라고 이상한 여러 장애인들이 서로 격리되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상호의존하고 부양하며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자치공동체 마을이 진정한 복지세계인 것이다. 전통마을 마다 다 있었던 이러한 자생적이고 자치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인위적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해체하고 강제로 빼앗아 분리해간 것이 이른바 오늘날의 복지국가주의와 그 제도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가와 시장이 장악하고 있는 복지제도를 지역자치공동체로 되돌려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로 가는 길이다.

되돌려 줄 자치공동체가 지금 없는 것은 그런 모든 자치적 마을 공동체의 기능들을 국가와 시장권력이 모두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국가권력의 강제에 의한 복지제도를 국가가 포기하는 것이 바로 그런 자치공동체와 자치복지사회를 되살리는 길이다. 아마 이것을 모르는 멍청이 정치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치 공동체를 살려 모두가 자치로 살며 자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하면 정치가가 할 일이 없고 설 자리가 없으니까 다만 모르는 체 할 뿐이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6월 21일 <오마이 뉴스>에서 네티즌과의 대화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노인층과 현재의 근로자층, 미래세대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는 만큼 세대간의 타협은 불가피하지만 “국민연금을 없애자”는 네티즌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있는 복지부장관의 근거를 부인하는 연금제도를 없애자는 데 스스로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원한다면 폐지 못할 제도가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데 절대 불가라는 말은 과거의 민주투사라면 해서 안 될 반민주적 발언이 아닌가?

자치 바라지 않는 정치가들

아마 그는 다수가 국민연금의 폐지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수야말로 정치적 조작과 공작의 대상임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김근태 장관이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견뎌가며 반대했던 유신과 전두환 5공 체제도 그들의 정치적 조작과 강제에 의해서일망정 표면적으로는 절대 다수 국민의 지지로 그 존속이 가능했다. 지금의 보험제도에 대한 지지자가 만일 다수라면 그 다수도 복지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작된 다수일 뿐이다. 만일 국가와 같은 방대한 조직과 세금으로 국민연금의 허구성과 수탈성을 제대로 선전한다면 현재의 다수 지지를 한순간에 다수 반대로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복지제도는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복지국가주의자들과 복지시장을 위해 있다. 복지제도를 없애버리면 복지부도 그 장관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김근태가 복지부장관만 못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바라보고 있는 대권 행보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모진 고문 견뎌가며 추구했던 민주투사의 그 민주주의가 고작 세계시장제국주의에 안주한 복지국가주의라는 또 하나의 변종 국가주의로 귀착되고 말다니?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아무리 선한 정치가라도 스스로 제자리를 보장하는 정치를 부인하고 진정한 자치를 바라는 정치가는 없다. 자치는 기득권을 갖지 않는 주민들의 운동으로 쟁취해야 한다.

우선 주민 불복종으로 국민연금 제도부터 없애야 한다.

/천규석(농민·대구한살림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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