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범죄에 관해서 시효를 배제하자는 제안이 있다. 이는 위헌 소지가 있다는 말로 간단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공권력의 직권남용이나 권력의 부당한 행사를 통제할 제도적인 장치들이 제대로 작동되는가를 보면 왜 시효 문제가 중요하고도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권력 남용 통제할 제도 있었나

국정원이 스스로 인정한(?) 김대중 정권 시절의 불법 감청 문제는 바로 불법을 자행한 전직 국정원 직원이 통신비밀보호법과 국가정보원직원법을 위반하여 공개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치권은 특검법이다, 특별법이다 하며 논의만 무성하다. 정치권이 이렇게 반응하는 본질은 결국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거다. 이 감청된 내용에 들어 있는 떡값을 받은 전현직 검사들의 실명이 공개되자, 검찰은 바로 국정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다. 유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불법감청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대응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직권남용에 대해서 직권조사를 할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만 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의 국가기구라는 것들은 다 불법을 예방하거나 불법적인 방법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공론화 되지 않거나 국민은 모르게 되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만다.

우리는 개혁을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적 합의 즉 새로운 질서와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고 있다. 특히 정치권이 그렇다. 불법도청 문제의 본질은 불법적으로 도청한 정보기관이 존재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역시 불법적으로 대선에 개입했던 재벌과 언론사 사주들의 추악한 국민주권 유린행위가 버젓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민의 국가인가 아니면 일부 권력층과 일부 언론사 사주들의 주식회사인가?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4·3사건의 희생자들에 눈감고 고통으로 살아왔던 그 유족의 삶을 망각하는 사회가 과연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 국가는 부실한 진상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유령의 성 같은 대규모 위령 공간을 마련했다고 우리 사회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한국전쟁 전후에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과거사정리기본법이라는 불철저한 법을 갖고 제대로 조사나 할 수 있을까?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의혹의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진상규명을 하지 않고, 아니 어떤 면에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거나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새로운 논리를 국민들에게 기억시키는 국가가 국민의 국가인가? 그렇지 않다. 국가는 자신의 불법행위에 대해서 그 피해자 한명 한명에 대해서 뼈저린 사과를 해야 한다. 국가가 할 일은 철저한 진상조사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명예회복과 배상 조치이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과거라고 넘겨 버리는 인식으로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어떤 이는 수십만에 달하는 국가공권력 피해자들에 대해서 배상한다면 국가경제가 도탄에 빠지고 국가재정은 바닥이 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희생된 사람 가운데 정말로 이적행위를 한 자들이 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인식이 과거 독재시절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인식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묻어 두자는 얘기다. 결국 역사적으로 우리 국민은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않았고 과거는 과거로서 훌륭했다는,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과거 체제를 옹호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공권력의 불법행사로 인해 온 생애를 숨죽여야 했던 2등 국민을 만들어 놓고 또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가 바로 후진국가다.

인권피해에 ‘시효’ 란 없다

시효 문제는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준을 정확히 하고 이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정확하게 각인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국가가 배상할 유족이 많다면 단돈 1원이라도 해야 한다. 상징적으로라도 국가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분명히 밝히고 용서를 구하고 그 유족들의 통한을 기억해야 한다. 아니면 일정한 금액을 집단적으로 배상하는 방식이 있다. 시효가 위헌이라고 말하기 이전에 시효 문제가 제기되는 우리 시대 정의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그 정의는 바로 인권 피해자에 대한 국가의 태도이며 우리 사회 국민들의 양식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국가 범죄의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공식적인 배상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자. 인권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시효는 없다. 인권은 국가의 존립 근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존엄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창수(새사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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