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강한 걸로 치자면 우리 어머니들보다 강한 분들이 있을까.

우리 어머니 세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가서도 집안일이며 농사일이며 거뜬히 해냈다. 자식도 쑤욱쑥 너덧명씩 낳고 해산한 다음날 또 밭에 나가 일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새끼들 굶겨 죽일까봐 당신들 몸은 돌볼 새도 없이 동분서주했다.

어머니들이라고 어찌 어려움이 없고 죽고 싶은 때가 없었으랴. 그래도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낫겠다고 여겼고, 한 몸 죽고나면 남아있을 자식들 때문에 운명을 짊어지고 희생하며 살아온 이들이 바로 우리 어머니들이다.

생활고 비관 자살 줄이어

우리 어머니들도 생활고를 비관해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지거나 기찻길로 뛰어들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뛰어든 그 이후에 벌어질 여러 가지 일들을 가늠했기에 어머니들은 발길을 돌렸다. 그 때 어머니 손에 이끌려 기찻길이나 강물 앞까지 갔었던 자식들은 지금 사회에서 맡은 역할을 잘하고 있다.

최근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 8일 사천의 한 아파트에서 30대 초반 주부가 네 살 짜리 아들과 함께 투신했고, 10일에는 창원에 살고 있는 20대 여성이 별거중인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 둘을 돌보다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목매 자살했다. 16일에는 거제 신거제대교 난간에서 20대 후반 주부가 세 살된 남자아이와 3개월된 여자아이를 안고 바다로 뛰어 내렸다. 그런데 엄마는 살려고 헤엄쳐 나와 살고, 남매는 실종됐다. 이 엄마는 두 남매를 키우기가 힘들어 자살할 결심을 했다고 한다.

인터넷상에 자살 사이트가 생겨나고 실제 그 사이트에서 만나서 자살까지 감행하는 세상이 됐다. 끝까지 살아보기도 전에 사람들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는 얼마든지 많다. 질병, 우울증, 실연, 권태, 자기연민, 환청, 아니면 단순한 모방일 수도 있다.

모방자살은 마릴린 먼로가 죽었을 때 굉장했다. 마릴린 먼로가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털어넣은 뒤 1962년 로스앤젤레스의 자살률은 40%나 증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증가율도 193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모방자살의 심각성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한 여학생이 오시마섬에 있는 화산 분화구 속에 뛰어든 뒤로 2년에 걸쳐 총 1207명이 그 여학생의 뒤를 따랐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살의 모든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행감’으로 귀결된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무리 나빠져도 그렇게까지(자살할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는다.

요즘 일어나고 있는 생활고 비관 자살은 나약한 현대인의 자화상으로 비쳐진다. 또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자살을 선택하는 걸 보면 꽤 극단적이다.

어머니 세대들의 생활고와 비교했을 때 지금의 생활고가 더 힘겹고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각자 힘겨움의 무게와 절박함의 두께가 다르겠지만 자살은 자멸의 버튼이다.

자기 혼자만의 인생게임이라면 자살이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전혀 죽을 준비도 돼 있지 않고, 죽을 까닭도 없는 자식을 강제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넣는 것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불행감’ 이길 인생교육 절실

자신이 불행하다고 자식까지 불행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른바 ‘동반자살(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살이 아니므로 이 말은 사실상 틀린 말이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약하거나 혹은 극단적인 성격의 형성으로 자살을 취할 수 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문제와 죄의식 없이 행해지는 부모들의 잘못된 선택에 태클을 걸 방법은 교육이다.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지극히 나쁜 ‘불행감’이 와도 헤쳐나갈 수 있는 인생교육이 절실하다.

볼테르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 옹호자들의 말인즉, 집에서 살다가 싫증이 나서 그 집을 포기하는 게 별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허들판에서 자느니 차라리 다 쓰러져가더라도 집에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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