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체적 위기란 말이 한 때 유행했다. 여기서 ‘한 때’란 수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건 느낌으로 온다. 각론으로 말해야 공감이 빠르다.

‘정치적 위기’라고 하면 정쟁이 앞뒤를 가리지 않을 때, 그래서 국민정서가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를 말한다. 경험상 우리는 정치적 안정감을 누려본 일이 없다.

‘사회적 위기’는 통칭 사회적 정의감이 실종되는 현상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원칙이 통하지 않고 편법이나 물질위주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의 도래다. 원칙을 지키면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험상 우리는 사회적 안정감 역시 누려본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끝없이 평행선으로 달리던 여·야간에 대승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약자인 야당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 것이다. 대치국면을 지겹게 바라본 국민들이 한순간 개운한 기분으로 이회창총재의 결단을 환영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서로간의 당리가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해서 큰 폭의 행보를 붙잡는다. 명분싸움이 당략을 좌우한다.

어느 정권에서나 누증의 병폐로 쌓아올린 일방통행은 수십년 야당 전력의 현 정권에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야당 경험이 풍부하기에 사소한 건에 있어서도 야당의 공격전술을 꿰뚫고 있다.

공격기술보다 방어와 수성의 전략이 더욱 다부지다. 한번 기선을 빼앗기면 죽기라도 하듯 온갖 잔재주를 동원해서 이익선점에 혈안이다. 대화와 타협의 민주화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정치풍토 아래 국민대타협이 근간인 개혁과 구조조정이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구조조정이 경제부활의 전제조건이라면 그보다 근본적인 정치복원이 선행돼야 한다.

정치권이 국책에 대해 절충하고 최선책을 도출한 후에 그걸 제시해야 이익단체들이 승복한다. 지금은 정치따로 국민따로의 이분현상에 빠져있다. 각각의 목소리로 한 마리의 새를 둥지틀게 할 수 없다.

정치적 공동선이 요원한 실정에서 사회정의가 뿌리내리거나 국민총화가 창출되기란 지난하다. 한전이나 대우차 노동자들이 파국을 밀어낸 것은 정책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국가경제적 불행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되겠다는 위기감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식대로’ ‘우리 이익따라’라는 철통무장의 정치집단보다는 가슴이 넓다는 결론이다.

30초반의 젊은이가 몇천억원의 남의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이상한 금융풍토, 27세의 청년이 뒤따라 똑같은 수법으로 경제상층부를 요리할 수 있는 나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불가해한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걸 막아서 금융정의를 확립하라고 만든 금감원은 시계추를 거꾸로 돌리고 있다. 그렇다면 금감원은 누가 감시해야 하나.

시중 경제는 피어날 기미가 없고 서민 살림은 쪼들린다. 당장 몇만원 몇십만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억과 조를 오르락 내리는 변칙 경제 현실은 괴리감을 깊게 할 뿐이다.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몇 십조원의 공적자금을 국민부담으로 쏟아부으면서 원죄자들에 대해 책임규명 하나 없는 이상한 기류가 사회를 지배한다.

검찰이 빼든 사정의 칼날이 이처럼 피로에 지친 사회정의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드는 것인지 그리고 그 칼날을 어디다 들이대야 할 것인지는 본질문제에 속한다.

도마뱀의 꼬리를 아무리 잘라봐야 칭찬 듣지 못한다. 정치권에 청청하고 재량권에 엄격해야 시대적 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를 잡을 수 있다.

총체적 위기는 어느 한 때가 아니라 전에도 있었고 지금은 반복학습에 의한 누란의 경지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사회정의가 바로서야 경제가 산다. 반대로 정치질서가 그 모든 것을 리드할 것이라는 일반론이 설득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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