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민간인학살 사건 가운데 드물게도 학살책임자 중 한명이 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바로 김해 진영 강성갑 목사의 학살책임을 물어 김병희 진영지서장이 총살됐던 것이다.

그러나 진영 학살사건의 진짜 책임자는 해군과 육군의 특무대(CIC)였다. 전국의 예비검속이나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직접 지휘한 것도 CIC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수인이나마 학살 책임을 지고 사형집행이 이뤄진 점은 특이한 일이다. 그것은 바로 ‘목사’가 희생됐기 때문이었다. 김해 한얼고등학교의 창립자이기도 한 강성갑 목사가 학살되자 미국 선교단체와 UNKRA(국제연합 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 언론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자 이승만 정권은 부랴부랴 학살관련자들을 구속시켰다.김병희 지서장과 하계백 부읍장, 의용경찰(청년방위대) 강백수.강치순 등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김병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풀려나왔다.

국회 조사기록에서 당시 여동생을 잃었던 김영봉씨(작고.당시 진영유족회 고문)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1심 구형이 전부 사형이었는데 지서 주임만 사형을 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10년 징역에 3000만환을 김종원(당시 계엄민사부장)이한테 갖다주고 한달도 못되어서 형집행정지로서 나와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사람이 현재 살고 있습니다.”

김영봉씨는 여동생 영명씨(당시 23세.진영여중 교사)를 잃었지만 스스로도 학살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생존자이다. 그의 증언을 좀 더 들어보자.

“지서에 가서 보니까 사람이 10여명 있었는데…진해 해군 G2 대장이 진해까지 가서 물어볼 말이 있으니 갑시다 그래 트럭을 타라고 해서 타고 갔습니다. 15리 가량 가서 자동차가 고장이 났다고 해서 걸었습니다. 거기에서 내릴 때부터는 밧줄을 가지고 두사람씩 묶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변에서 100미터 밖에 안떨어진 산에 올라가서….”

그는 이곳에서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고 살아났다. 장소는 창원군 동면 덕산고개였다고 한다. 그의 여동생이 학살된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내가 안죽고 도망갔다는 걸 안 그들이 집안 식구를 데려다가 고문하면 틀림없이 나올게다 해서 여동생을 데려다가 죽인 것이지요.”

당시 진영유족회장이었던 김영욱(79.현 부산경남유족회 고문)씨는 이에 대해 “영명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면서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 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버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욱씨 또한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추앙받던 부친을 잃었다. 그의 부친 김정태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던 민족자본가였다고 한다. 당시 청년방위대 간부가 이사하는데 필요하다면서 자동차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이를 거절한 데 대한 앙갚음으로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영에서만 251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김영욱.김영봉씨를 주축으로 한 유족회는 이들의 유골을 모두 발굴, 진영읍 설창리 국도변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5.16쿠데타와 함께 이 합동묘는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헌병들이 들이닥쳐 묘를 마구 파헤쳐 버린 것이다. 두 김씨를 비롯한 유족회 간부 4명은 구속됐다.

학살을 자행한 군 관계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국회 조사기록에는 이렇게 돼 있다.

○조일재 의원=그 당시에 CIC대장과 지서 주임은 각각 불법살인죄로 사형집행을 당했지요.

○증인(김영욱)=CIC대장은 안당했습니다. 당시 CIC파견대장은 이명규입니다. 그때 계급은 중위입니다. 지금 소령이랍니다. 서울에서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군법재판에 회부가 안되었습니다.

○위원장(최천)=그 때 군대에서는 몇사람이나 처벌당했는가.

○증인(김영욱)=군대에서는 한사람도 처벌을 안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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