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ㅣ강

소설책 한 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그냥 읽기, 영화 대본으로 각색되기, 낮잠 잘 때 베고 자기, 찢어서 코풀기, 치한 퇴치용으로 마빡 때리기, 비탈길 차 바퀴 밑에 받치기, 화분을 올려 놓는데 받침으로 쓰기, 키가 작아서 얼굴이 닿지 않는 연인과 키스할 때 발 올려 딛고

서기 등등. 가만 생각해보면 책은 단지 읽어질 때만 가장 재미없는 기능을 하는 것 같다.

대부분 한 권의 소설책이 읽혀지는 기능만 하고 끝나는데 도무지 그러지 않는 게 한 권 있었다. 이미 그것은 발빠르게 영화의 대본이 되어주는 역할도 해버렸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복잡한 심경을 던져 주기도 했다. <진주 귀고리소녀>는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창의적인 그림 감상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 한 점을 들여다보는데 그친 게 아니고 오감을 통하여 감상을 한 것이다.

나는 종종 학원에서 같이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그림을 볼 때 보지만 말고 그림 속에서 들려 오는 소리와 냄새를 맡게도 한다. 그림 속의 인물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그것을 실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좋은 책에 대한,

그 속에 보석핀처럼 반짝이는 창의성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면서 나의 움직이지 않는 시선에 절망한다. 내 안에 들어 있는 구태를 다 쏟아내고 새로운 것을 나도 쓰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뿌리까지 뒤흔드는 강한 자기 부정임을 안다. 나는 나대로의 색깔이 있고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색깔이 있는 것이다.

화가와 소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며 실제로 책 속에 수록된 베르메르의 미술작품들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도시 델프트의 풍광과 그 속에 살아 가던 사람들의 소박한 꿈과 사랑을 전해주고 있다.

가난한 부모들을 위해서 남의 집으로 살림을 살아 주러 가거나 공장으로 돈을 벌러 떠났던 우리 시대의 진주귀고리 소녀 ‘그리트’ 들이 그 도시의 한 골목길을 잰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여름에 휴가를 떠나지 못한 사람이 있거나 혹시 휴가 떠나서 비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 때를 대비해서 책 한 권 넣어가는 게 어떨까?

휴가를 못 떠나는 이에게는 이국의 풍경으로 안내해 줄 것이고, 휴가 떠나서 지루한 사람에게는 꼼짝없이 이 책 한 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화가 베르메르와 소녀 그리트 사이에 어떤 일

이 있었던 것일까, 의구심이 생기면서 사용하지 않았던 당신의 상상력이 작동하게 될 것이다.

/김숙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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