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 지음ㅣ솔

김 선생님 보세요.

여름의 한 가운데로 치닫는 계절은 한 낮이면 울어대는 매미소리조차 숨 가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책 한권이 저녁이면 바쁜 일상의 한가로운 여백을 만들어 주어서 한 동안 즐거웠습니다.

통상, 그림은 보는 것, 또는 감상하는 것의 대명사라고 생각했는데 그림을 읽는다니, 처음엔 낯선 듯도 했지만 요즘은 영화를 보는 것도 ‘영화읽기’라고 하기에 천천히 책갈피를 펼쳤습니다.

옛 그림이라 함은 그저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 그리고 교과서에서 보았던 몽유도원도, 신사임당이 그렸다던 세밀하고도 다정한 그림들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어요.

유년시절 크레파스화를 그리면서부터 한국화보다는 서양화의 기법을 먼저 익혔고 흔히 볼 수 있는 그림들 또한 서양의 유화나 수채화인 탓이기도 하겠지요.

서양의 그림은 오래된 것이라 할지라도 두껍게 칠해진 물감과 선명한 색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색에 대한 선망이 그림을 통해서 여실히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연금술사들에 의해 색이 만들어지고, 주로 광물에서 얻어지는 재료들을 이용하면서 그 독성에 의해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하니까요.

나폴레옹의 죽음 또한 벽지의 물감이 유배지의 눅눅한 습기와 화학 반응을 일으킨 ‘비소’에 의한 것이 실제 원인이었다고 하니, 그들의 색에 대한 선망은 참으로 열정적이었나 봅니다.

오래된 동굴벽화조차 색이 가미된 것을 보면 이 땅엔들 색이 없었겠습니까만, 색을 써야 할 그림은 수묵담채라고 하여 표현하였고 수묵화는 ‘먹’하나만으로 맑음과 탁함 그리고 가볍고 무거움을 표현해 내었으니 우리 옛 그림의 읽음은 거기서부터 이미 시작 되었다 하여야 할 것 같아요. 색을 써야 할 것과 색을 절제하여야 할 것을 잘 알고 선택하였으니 말입니다.

한국화 보며 ‘일상의 여백’ 에 즐거웠습니다

‘먹’은 탄소 알갱이를 ‘아교’로 이겨 굳히고 향료를 첨가한 재료라 합니다. 이것을 벼루에 갈면 검은 색 한 가지 밖에 없지요. 이 한 가지 재료로 형상의 재현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할 것 같아요.

먹과 물을 잘 이용하여 번짐이 좋은 한지에 적합하게 한 획 한 획을 리듬을 타듯 이어나갔을 그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 마음조차 숙연해지는 듯합니다. 물과 먹과 마음의 베풂이 거기에 담겼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림을 그리며 마음에 두는 사람을 생각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함께 담았으니 ‘그림을 읽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하지요. 그림의 이해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이 ‘프리즘’을 통하여 발견한 색 띠를 ‘스펙트럼’이라는 이름을 붙인 후 색은 우리 생활과 끝없는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하지만 한국화에서 보는 수묵화는 검은 색의 먹 하나만의 절묘한 사용으로 옛 선비들의 꼿꼿한 기백과 힘, 그리고 해학적인 기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한국화가 가지는 ‘여백의 미’에 대하여도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너그러운 여유로움으로 한결 시원한 여름 나시길 바랍니다.

/류미연(논술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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