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파일’보도로 불거진 권-재-언 유착을 보면서 불현듯 예전에 읽었던 소설 한권이 생각났다. 바로 97년 10월에 출간된 <이씨춘추(李氏春秋)>라는 책이다. 기아자동차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신행씨가 쓴 이 책에는 한국을 움직이는 재벌인 오성그룹과 그룹 오너인 이근수 회장이 등장한다.

제목도 그렇고 오성이니, 이근수니 하는 이름이 누구를 풍자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X파일’이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이 소설이 떠오른 것은 이야기 흐름이 ‘X파일’내용과 닮기도 닮았거니와, 재벌이 정치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성그룹 이근수 회장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 있다. 이 회장이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도로 치밀한 계획아러국내 정치권을 비판하는 소리를 낸다. 이례적인 이 발표는 한동안 한국을 요동치게 만든다. 문민정부 당시 뜨거운 화제가 됐던 ‘기업은 이류, 정치는 4류’발언이다. 이 발언이후 정부가 벌컥 화를 내자, 오성그룹은 ‘발언 진의 왜곡’운운하며 한발 물러서는 제스처를 취한다.

이 과정에서 오성그룹 수뇌부가 보여주는 행태는 한마디로 ‘공작’그 자체다. 재벌이 보는 관점에서, 재벌의 이익을 배가하는 형식으로, 재벌의 발언권이 제대로 먹히는 현실을 만드는 쪽으로 모든 일을 착착 진행시킨다. 결과는 실패도 있지만 대부분 성공한다.

97년 당시 출판되자마자 곧 서점가에서 사라진 이 책을 잽싸게 사본건 순전히 개인취향이다. 그리고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설마 그럴리가!’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지은이가 오성그룹과 이근수 회장으로 상징되는 재벌을 ‘강하게 씹고 있구나’(?)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전후 정황으로 보아‘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막연한 창작이라고 여기기엔 상황묘사가 너무 진지하고, 현실을 기막히게 설명하는 대목이 군데 군데 발견된 덕분이다.

그로부터 8년이 다돼가는 지금 이 소설을 ‘X파일’에 오버랩 시켜보니, <이씨춘추>는 흡사 작금의 사태를 미리 경고한 ‘예언서’인양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 매체에서는 이 책 내용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재벌이 지닌 어두운 면을 들추면서 그들을 통렬하게 야유했기에 많은 부분 공감을 사긴 하지만, <이씨춘추>는 여전히 소설일 뿐이다. 그럴싸한 구절이 흥미를 유발하기는 하나 그 내용은 누구도 검증해주지 않는 픽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인 ‘공작’은 21세기 한국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바로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힘’이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차원을 넘어 한국사회를 요리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공작이 탄생한다. ‘X파일’은 사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론 흔드는 자본 누군가?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힘’이 가장 큰 폐해를 낳는 곳은 언론분야다.

족벌신문도 어금버금 하지만, 삼성과 중앙의 관계에서 드러났듯이 언론에 침투한 자본은 언론이 지닌 사명을 심하게 일그러뜨린다. 언론을 무기로 잠재적인 경쟁기업을 공격하는 것은 기본이고, 여론까지 입맛대로 왜곡하기 일쑤다. 거대 재벌기업만 그렇다는게 아니다. 군소언론을 장악한 채 경향각지에서 맹활약중인(?) 자본은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X파일’은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재벌을 뼛속깊이 개혁하는 밑거름이 돼야 한다. 그런 한편 언론을 쥐고 흔드는 자본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밝히는 계기도 돼야 한다.

오성그룹 이근수 회장은 ‘기업은 이류, 정치는 4류’라고 발언했지만, ‘X파일’이라는 분석틀을 들이대면 이 발언은‘기업 정치, 공히 4류’라는 말로 정정된다. 지금도 현장에서 땀흘리는 수많은 기업인들을 도매금으로 몰아넣는 이 말은 곧 ‘언론을 무릎아래 꿇린 자본’이 종횡무진 설친 결과다.

양심적인 기업인들을 비탄에 빠트린 그들을 이대로 두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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