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대 박태일 교수, 한국문학회 학술대회서 밝혀

그동안 이원수 선생이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던 1930년대 말~1940년대 초에 도리어 두번째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암울기 활동 중단’ 사실과 달라

   
특히 이원수는 이 당시 발표했던 작품을 이후 194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발표사실을 숨긴 채 재발표하고 첫발표로 기정사실화하듯 했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8일 부산 부경대에서 열린 ‘한국문학회 2005학년도 춘계 전국학술대회’에서 경남대 박태일 교수가 ‘나라잃은 시대 후기 경남·부산지역 아동문학-이원수와 남대우를 중심으로’를 통해 드러났다.

박교수는 이원수의 동시집 <종달새>에 실린 작품에 첨부된 각 작품의 게재 연월 기록을 확인하기 힘들거나 잘못 기록됐다고 밝혔다.

“<빨래>등 7편 광복기에 재발표 외적 맥락 손질 의도도 엿보여”

작품 게재 연월 기록을 밝히지 않은 <가시는 누나> 1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32편 가운데서 <염소> 1편을 뺀 31편은 확인이 어렵거나 잘못 기록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이원수가 쓴 작품을 갈무리하면 모두 43편 정도로 추정된다며 박교수는 이들 작품을 목록화해 제시했다.

이 중 원본을 확인할 수 없는 13편을 빼면 모두 30편으로, 이 중 7편은 광복기에 재발표됐다.

족보기에 의하면 재발표작은 <애기와 바람> <전기ㅼㅐ> <돌다리 노차> <밤시내> <니 닥는 노래> <빨래> <어머니> 등 7편이다.

또한 이 ‘족보기’에는 동시 <야옹이> <공> <밤> <기차> <언니 주머니> <저녁 노을> <봄바람> 등 박교수가 이번에 처음 발굴한 이원수의 작품 7편이 포함돼 있다.

즉 이원수의 활동 가운데 두 번째로 왕성했던 때가 이 때(광복기)였다고 박교수는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재발표와 이 시기 씌어진 이원수 작품의 게재 연월이나 매체명 등 그 정보가 틀린 ‘기록훼손’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을 것으로 박 교수는 추정했다.

이 시기는 일제에 의해 국민총동원과 국민총력이 저질러진 시기로 민족문학의 고난스러운 억압기였으나, 이원수 개인에게는 씻기 힘든 부끄러움을 안겨주었을 부왜작품 발표 사실이 가로놓여 있는 때였다는 것이다.

박교수에 따르면 이원수는 어떤 뜻에서인지 그 시기 발표 사실을 의도적으로 묵살하듯 재발표 형식을 빌리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작품의 외적 맥락을 손질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재발표작도 보인다.

박교수는 “광복기 민족 현실에 발을 깊이 들이민 뛰어난 작품이라고 알려진 몇몇 작품이 사실은 1940년대 초반에 씌어졌다는 사실이 이번에 밝혀졌다”며 “이러한 기록의 부정확함은 부끄러운 전적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억압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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