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 파업이 끝나고 먼지가 내려앉던 버스가 다시 도로를 누비기 시작했다. 익숙한 세상의 풍경을 되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12시간만 버스가 꼼짝하지 않아도 시민들에게 고역일텐데 무려 12일 동안 그랬다면 사람들의 일상은 혼란과 마비의 아수라장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국의 개입으로 대체교통수단이 등장함으로써 시민들의 불편은, 약속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이용해야 하거나 언제 올지 모를 차를 기다리며 낭비한 시간에 대해 한탄하는 것 이상을 넘지 않았다. 그것이 파업을 감행한 버스 노조가 바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한 불편은 시민의 욕을 실컷 얻어먹는 것 말고는 얻는 바가 없다.

사용자 압박위한 마지막 카드

모든 파업이 그렇듯이 버스 노동자들이 운전대를 놓는 것은 사용자를 압박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이다. 시민의 발 노릇을 중지하지 않고는 협상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화가 결렬되고 다른 선택의 길이 없을 때 남아 있는 건 시민의 불편을 담보로 사측과 협상하는 것일 뿐이다. 대중교통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사회에서 발이 묶인 시민의 불편은 원성으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시민들의 원망과 아우성이 커질수록 초조해지는 쪽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버스 노동자들이 아니다. 시민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고통은 버스 노동자에게는 막다른 협상 수단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당국이 파업을 파업 같지 않게 만들어버려서 시민들이 불편을 제대로 느낄 기회를 가로막는 건 버스 노동자들의 무기를 치워버림으로써 협상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업주들로서는 파업이 저승사자가 아니라 막강한 원군을 불러다주는 절호의 기회가 된 셈이다. 당국이 알아서 버스를 대신 굴려주니 단체교섭 테이블에서 파업이 두려워 양보하고 타협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그러니 막다른 골목에서 공룡과 싸워야 하는 버스 노동자들에게 승산이 있겠는가. 승용차를 함께 타는 데 나섰던 시민들의 움직임도 결과를 따져보면 선의와는 무관하게 둘의 싸움에서 힘센 쪽을 일방적으로 편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남의 싸움에 애꿎은 시민들의 발을 볼모로 잡는다고 버스 노조에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공공재인 버스의 성격상 공장의 기계와 달리 시민이 볼모가 되지 않는 파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으면 가르쳐주기 바란다. 파업 자체가 불만이라면 공공부문 노동자라고 해서 헌법에서 단체행동권을 부정하고 있는지 찾아보라는 말을 들려주어야 할까. 법이 인정하더라도 파업만은 안 된다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시민사회의 양식을 의심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나홀로 시민’ 은 없다

난마처럼 얽혀 있고 만인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복잡한 현대에서 ‘나 홀로’ 시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버스 사용자와 노동자들이 싸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고, 남의 문제가 내 터럭 하나라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태도는 이기적인 사람에게나 가능할 뿐 시민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질로는 부족하다. 버스 파업으로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는 불편함의 정도는 평소에 버스 노동자들의 노동가치와도 같다. 시민 스스로 불편을 느끼지 않는 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버스 노동자들과의 지지와 연대는 생겨나지 않는다. 평소에 버스 서비스가 형편없다고 불만이면 그것이 운전대를 쥔 사람들의 열악하다 못해 원시적인 노동환경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테고 그렇다면 버스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순리라고 믿는다. 아무리 그래도 시민들이 고통을 겪는 건 부당하다고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불평과 분노는 파업의 원인에 돌려져야지 파업 자체를 겨눌 일은 아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처지에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임에도 기록적인 파업 일수를 일구어낸 버스 노동자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지지를 보냈으니 나도 요구를 말해야겠다. 파업의 성과만큼 시민의 친절한 발이 돼주기를 바란다.

/정문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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