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대두된 화두중 하나는 ‘시간’의 문제였다. 이전 사회에 사람들은 자연의 순환리듬에 맞춰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구성해왔다. 자연은 순응의 대상이었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로의 ‘거대한 전환’은 새로운 시간기획과 철학을 요구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 ‘격상’되었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도 역전되었다. 즉 자연은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바뀌었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자연과 인간의 역전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근대적 합리성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어갔다. 자본주의 효율성은 근대적 시간기획의 준거점이 되었고 이윤추구에 반하는 모든 시간은 비효율로 인식되어 제거가 되어 갔다. 이때부터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도 보편화되었다.

근대적 시간기획의 핵심은 자연의 리듬에 종속되어 있던 인간의 일상을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인위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이다. 주체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자본가계급이었다. 토지라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인간들은 자신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시장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임금노동자화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의 일부를 화폐와 거래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시간을 구매한 고용주는 이윤추구의 극대화를 위해 시간을 세밀하게 기획해 나갔다. 시간의 기획을 둘러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의 효율성에 기반을 둔 자본의 무한한 탐욕은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정착되어갔다.

근대적 시간기획은 시간낭비의 불가능성을 초래했다. 돈이 안 되는 시간의 사용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되었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대두되면서 삶의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다. 근대적 시간기획에 따른 속도사회의 등장은 시간활용에 대한 인간의 창의성과 자율성, 상상력을 박탈해버렸다.

축적 산업화를 경험해 온 한국사회의 속도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경쟁적 속도사회에서 인간은 대부분 삶의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효율적 재생산에 바치게 된다. 사회적 성공의 기준도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질 수밖에 없다.

21세기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은 풍요의 청사진을 앞 다투어 내놓았다. 정보통신혁명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은 ‘결핍사회’를 종식시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켜 ‘노동의 시대’에서 ‘여가의 시대’로 이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일상은 어떤가? 너무 많이 일을 해서 과로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경제적 생활의 피폐화로 세상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빈부격차로 사회갈등의 폭발은 안정적인 사회유지를 위협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회복불가능 환경파괴의 문제이다. 이대로 간다면 더 이상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이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성장에 목을 매고 있다.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더 많은 물질이다. 웰빙열풍이 불고 있지만 이러한 흐름 역시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지 오래다.

느림의 미학에 관심을

일상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출발은 개인들만의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시간기획과 속도를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소비자본주의가 구성한 욕망체계도 새롭게 재구성하자. 속도의 사회는 이미 실패했다. 그렇다면 대안사회의 키워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근대적 시간기획의 토대가 된 속도가 아니라 ‘느림의 미학’을, 자연 파괴적인 발전체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생태의 미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의 사회경제체제는 더 많은 상품생산과 더 많은 상품소비 및 폐기를 통해서만 지탱할 수 있는 체제이다. ‘필요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이윤논리에 의한 생산이 초래하는 결과는 참담하다. 경쟁의 효율성은 사실상 속도사회에 기반을 둔 자본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다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과 속도사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백두주(경남대 강의전담교수·사회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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