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까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정문순(문학평론가)
창원 마산 지역 시내버스가 파업에 들어간 첫날, 40여분을 기다려 창원시에서 마련한 전세버스를 타고 몸을 이동했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니 크게 불편을 느꼈다고 할 만한 건 없었다. 물론 시 당국의 ‘배려’가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느냐 생각하니 내 몸이 불편을 제대로 몰라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업으로 인한 불편을 모르는 것이 파업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안되겠기에 하는 말이다.

버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흔히 애꿎은 시민들만 곤욕을 치른다고 파업 노동자들에게 비난을 퍼붓기 일쑤이지만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버스 노동자들이 핸들에서 손을 놓음으로써 시민들이 몸소 불편을 겪지 않으면 그들의 요구 사항은 시민사회의 의제로 떠오르기 힘들다는 사실은 흔히 간과된다.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데 관심이 갈 리 없다.

시민의 불편을 담보로 하는 파업은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시민이 파업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임으로써 개입을 낳는 효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루에 몇 끼니를 거르는지, 배차 시간을 지키려면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 있는지 없는지 시민들에게 알림으로써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버스 파업 노동자로서는 시민의 참여와 관심이 가장 큰 원군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처럼 파업을 해도 대체차량이 동원되어 시민이 불편을 ‘제대로’ 느낄 기회가 막히는 한 시민들의 응원은커녕 비난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파업 노동자들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은 시민의 인질 운운하며 그들을 도덕적으로 매도하는 언론 등 여론 창출 집단의 공세일 것이다. 여론을 만드는 곳이나 기득권 세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민단체들까지 이런 데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파업의 명분을 따지는 것이 시민단체로서 할 수 있는 말인가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민단체 사람들이 자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 대중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오산이다. 파업으로 버스에 오르지 못하는 시민들도 자신의 직장에 들어가는 순간 모두 노동자들이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하니 어쩌니 논하는 건 결코 시민사회의 덕목이라 할 수 없다. 남에게 부여된 권리 행사의 시비를 따지며 주제넘게 나서는 시민단체는, 100년이 넘는 노동운동사가 노동자들이 노동3권을 일구기 위한 장구한 세월과 다름 아님을, 파업할 수 있는 권리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바친 희생이 얼마나 컸는지, 시민운동가 그들이 자신들의 발판으로 내세우는 시민사회 역시 노동운동의 성장에 크게 빚지고 있음에 전혀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야겠다.

지역 시민단체가 노·사·정 회의를 모델 삼아 사용자와 노조측의 중재에 나설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파업 중단이라는 전제를 내세우는 모습에서 공공부문 노동자의 파업은 안된다는 수구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파업반대 이유로 공공성이 들먹여지지만 약자의 권리 향상이야말로 공공성에 부합한다는 인식은 찾을 수 없다.

경남소비자단체협의회(18개단체)와 경남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24개단체)는 2일 오후 창원시청 프레스룸에서 가진 마창 시내버스 파업에 따른 기자회견에서 이 같이 밝히고, “노사는 성실한 협상을 재개하고 파업을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약자의 생존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시민의 불편을 같은 무게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의 이익이 중한 줄 안다면 진작에 파업 전에 기계이기를 강요당한 버스 노동자들의 삶에 먼저 눈길이 갔어야 할 일이다. 그나마 파업이라도 일어나니 여론이 환기되고 시민단체가 중재에 나설 수 있는 것 아닌가.

버스를 타려면 30분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인 불합리 투성이인 시내버스 배차 시간이 최근의 전면적인 운행 개편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점만 생각했지 그것이 버스 노동자들을 얼마나 죽어나게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파업이 아니었으면 모를 뻔했다. 버스에 타면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미처 내리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현실이 파업으로 나아질 것인가 생각해본다.

시민들이 버스 노동자에게 지지를 보내준다면 설마하니 짐짝 취급을 받지는 않겠지, 조금이라도 승객다운 대접을 받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시민의 불편을 담보로 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이 없다면 시민들은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면서도 그 분야에서 소외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정문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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