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런 일이다. 지난달 27일 울산건설플랜트 노조와 사용자쪽 대표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비롯한 4가지 의제에 중간합의를 했고, 1일 울산건설플랜트노동조합 조합원들은 합의결과를 가결했다.

   
울산건설플랜트노조. 그들은 현행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최소한의 권리를 따내기 위해 76일동안 파업을 벌였다. 장기파업으로 사용자쪽도 적잖이 피해를 입었겠지만, 10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과 그들에게 딸린 가족은 생계를 접고, 피·땀으로 옷이 범벅이 돼야 했다.

파업이 일단락 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열흘전 마산을 찾았던 울산지역 건설플랜트노동조합 가족대책위원회 임경희·신임연씨의 얼굴이 맨 먼저 떠올랐다. 그들은 당시 ‘소박한’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으로 비타협적인 사용자들의 태도와 노무현 정부의 조직적인 노동운동 탄압을 가장 앞자리에 꼽았다. 의견에 수긍을 하면서도 그게 ‘밑절미’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오히려 파업이 장기화된 것은 신문과 방송의 책임이 가장 크다.

언론에서 노조원들이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대해 암니옴니 취재했었다면, 노동자들의 목숨 건 농성을 ‘호화농성’이라는 따위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랬다면 노동자들의 ‘폭력’만 훌닦기 보단, 경찰의 ‘토끼몰이’와 방패질로 수백명이 중경상을 입어야 했던 사실이 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졌을 것이다.

또 언론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객관적 사실’만이라도 보도됐다한들 과연 사용자들이 단 한차례도 교섭에 나서지 않는 ‘만용’을 부릴 수 있었을까.

노동조합을 무조건 두남둘 뜻은 전혀없다. 다만 여론을 독점하고 있는 일부 신문과 방송이 부리는 ‘뒤틀기’와 냉갈령 속에 노동자들은 더욱 절망으로 내몰린다는 것을 짚고 싶을 뿐이다. ‘말할 수 있음의 폭력’이다.

소설가 공선옥은 말한다. “…살인적인 강도(强度)의 노동에 온몸을 맡기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향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자’들의 글조각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