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소련의 모스크바 대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의 일이다.

9월 신학기에 신입생이 입학하였는데도 학교 분위기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필자로서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한국에서라면 신입생들이 온 학교를 뒤집고 다니면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군대든 학교든 신참 냄새가 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도대체 신입생인지 고학년 학생인지 구분이 가지도 않고,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교정을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학사제도 때문이었다. 전체신입생을 정원의 115% 만큼 뽑고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갈 때 그 중 최하위 10%를,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갈 때 5%를 탈락시킨다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렵게 들어온 대학을 중도에 탈락시킨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현명한 처사였다.

시카고학파의 경쟁 논리

대학생이면 이미 성인이다. 동년배의 청년들이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그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단지 국가가 미래를 위해 인적자원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생산에 기여하지도 않으면서 사회의 노동생산물을 소비하는 학생들에게 그 만큼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철저히 준비된 학생들은 나머지의 고급과정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다고 기대해도 좋다.

필자는 이 경쟁의 메커니즘이 한국 대학에 적용되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교직사회부터 적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연구와 지도에서 열정과 창의가 철저하게 검증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이 나라의 미래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때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학생들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경쟁을 강요하면서 교직자 스스로는 경쟁을 회피하는 처사는 부도덕하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지적본산은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과이다. 국가 개입과 관료적 한계를 지적하고 자본주의의 핵심인 경제적 자유주의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조류를 완성시킨 이 일단의 경제학자들을 우리는 시카고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M. 프리드만 이래 일급의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의 논리적 근거는 극히 간단하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경쟁에 부딪힌다는 것이 그것이다.

코카콜라가 독점하고 있는 곳에 언젠가는 펩시콜라가 나타날 것이며, 누군가가 전 세계의 오렌지를 독점한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포도 주스를 들고 나타날 것이다. 제록스 복사기가 지배하는 세계에는 캐논이, 코닥 필름이 독점하는 곳에서는 후지가 등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경제에서 독점이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며 경쟁은 모든 기업들에게 경제적 효율성을 강제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시카고학파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점이 아니라, 경쟁의 순리를 역행시키는 각종의 조직과 제도들이다.

의사협회나 변호사협회 같은 조직이 바로 대표적인 독점유지적 카르텔 조직이다. 이들은 어떤 이유를 내 세워서라도 자신의 이권을 유지하려 한다. 의과대학의 신입생 숫자를 줄이거나 법률대학원의 정원을 제한하려는 시도의 이면에는 항상 이들 조직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의료와 법률 분야에서 국민의 이익을 횡령하는 주범들이다.

필자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인 폭력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카고학파 이론의 의미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폭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으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조직들 자신이 신자유주의적 비판으로부터 얼마나 떳떳한가를 묻고 싶다. 과연 그들은 떳떳하게 경쟁을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경쟁의 결과 나타날 효율성의 증진과 함께, 필연적으로 수반될 사회적 상처에 대한 인도적 치유책을 제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는 그 조직들을 이기주의적 카르텔 조직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그러나, 어떻든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안빈낙도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주저 없이 이를 독점 카르텔이라 부를 것이며,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교직사회 변해야 산다

그 문제가 의료이거나 법률이라면 어떻게 참아 볼 수도 있다. 스스로 아프지 않고, 분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식의 교육 문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필자의 개인적 노력으로 해결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수치심도 잊은 채 촌지 봉투나 받아 챙기고, 학생을 짐짝 취급하는 선생들을 필자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수히 보아 왔다. 더 이상은 내 자식에게 그 꼴만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래도 안 된다면 어린 딸자식을 이역만리 외국으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정용택(경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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