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손창섭의 현대문학상 신인상(1955년) 작품인 <혈서> 속의 하숙생 규홍에게는 한이불 식객이 셋 있습니다. 일자리 갈망 고학 법대생 달서와, 상이군인을 자칭하며 밤낮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내는 준석, 그리고 떠돌이 붓장수의 딸로서 간질을 앓는 처녀 창애가 그들입니다.

그들 방 벽에는 문학청년 규홍의 습작시 <혈서>가 붙어 있습니다. ‘혈서 쓰듯/혈서라도 쓰듯 / 순간을 살고 싶다 / (1련 생략) / 모가지를 / 이 모가지를/뎅겅 잘라 / 내용 없는 / 혈서를 쓸까!’

늦겨울 저녁 때 일입니다. 준석은 또 달수를 병역기피자라며 자원입대 혈서를 쓰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고 나선 도마와 식칼을 갖다 놓고 발발 떠는 달수의 집게손가락을 얹게 한 뒤 잘라버립니다. 예까지만 얘기해도 어떤 독자는 지레 앞질러 말할 법도 합니다. “가만있자, 이거 ‘혈서’에다 ‘손가락 절단’에다 ‘이광재 단지(斷指)’ 이야기 같잖아”하고 말입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聖壽)만세 부르고…’

이 가요

‘일장기’를 ‘태극기’로

환창(換唱)한 나라여 ‘혈서’여.

/전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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