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변신·합체’ 고민중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 모두 차를 타고 늘 가던 찜질방에 갔다. 목욕하고 나니 점심먹을 때여서 근처 마트에서 점심을 먹었다. 엄마와 동생은 마트 안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아빠와 나는 지난 주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맡긴 후 엄마가 적어 준 대로 빵이랑 채소·화장품을 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마트를 나와 집으로 왔다.’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는 요즘 주말 풍경. 이 풍경 안에 ‘동네’는 없다. 동네 목욕탕에서 동네 미용실·동네 사진관·동네 화장품 가게와 슈퍼마켓까지. 이를 대신해 화려하게 구색을 갖춘 대형할인점이 동네 가게 갈 일을 대폭 줄였다.

실제 이마트 창원점에는 조선호텔이 운영하는 빵집 데이 & 데이와 사진 인화점 원 HP·박승철 헤어스튜디오가 입점해 있고, 롯데마트 마산점에도 브랑제리·한국후지필름·더 페이스 샵 등이 들어가 있다. 점점 소비자의 동선은 집과 대형할인점, 두 곳으로 단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주말 동네 점포들은 파리 날리기 일쑤.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협동조합에서는 ‘대형유통점 확산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미 포화상태인 유통시장에 다시 할인점 출점을 완화하는 정부의 방침에 들고 일어선 이들은 바로 동네 점포 상인들이었다.

경남을 비롯한 전국의 동네 슈퍼마켓과 문구정옷가게 대표들이 그나마 남은 동네 상권까지 파고들려는 대형할인점의 ‘지역밀착형 중형점포’ 개설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거리에 나섰다. 서명운동과 궐기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지만 동네 가게들의 운명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동네를 삶의 터전으로 삼던 점포들은 사라지거나 돌아나가거나 혹은 새로운 길을 뚫어야 하는 선택의 지점에 왔다. 그 변화상을 둘러보자.

미용실·사진관·화장품 가게 등 위기감 팽배

◇ 브랜드점처럼 고급화

마산시청 옆에서 ‘시민제과’를 운영하던 반석군(56) 씨는 지난해 말 22년 전통의 ‘만미당’을 인수하고 리모델링했다. 1억9000만원을 들여 건물 안팎을 고급스럽게 꾸미고 이름도 ‘시민 브랑제리’로 바꿨다.

브랜드처럼 깔끔한 외관에 요즘 빵집의 최고 고객인 40대 아줌마를 비롯한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어서 문 연지 얼마 되지 않아 관공서 단골 많던 옛 빵집만큼 매출을 올리고 있다.

37년 제빵 경력의 반씨와 더불어 종업원 2명을 두고 있는 이 가게는 크라운 베이커리나 빠리 바케트 등 브랜드 빵집과 대형마트에 입점한 호텔 베이커리의 공략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으로 고급화와 주인의 경력을 꼽았다. 대한제과협회 마산시지부에 따르면 현재 130여 개 빵집 중 80%가 ‘동네 제과젼이지만 전체 매출 중 80%는 반대로 브랜드 빵집과 마트에 입점한 베이커리가 차지하고 있다.

실제 마산대우백화점의 마듀, 신세계 마산점의 조선호텔 베이커리, 롯데백화점 창원점의 라브랑제리를 비롯해 마트 안의 빵집은 올 초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평균 15% 매출이 신장했다.

◇ 아기·남성 틈새시장 뚫기

할인점에 더해 디지털이라는 시대 추세로 폭격을 맞고 있는 사진관 사정은 더하다. IMF 관리체제 이후로 매년 5개에서 10개씩 문을 닫고 있는 사진관들은 대형화한 디지털 전문점이나 아기사진 전문점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대한프로사진관협회 마산시지부 김호진 지부장은 “현재 50~60개의 사진관이 영업하고 있지만 그 중 장사가 좀 된다는 곳은 몇몇 대형점이나 고급스런 아기 사진 전문점 정도”라고 말했다.

증명사진과 일반 사진 인화 건수는 거의 없고 백일이나 돌·회갑 사진 등 촬영 위주로 옮겨가다 보니 사진사가 사진관에 붙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제과점과 사진관에 비해 동네 미용실은 크게 줄지 않았다. 미용사회 경남지회에 따르면 현재 4500개 정도가 영업 중이며, 최근 2년 동안 30여 개 정도가 생기거나 주는 정도다.

최근 눈에 띄는 동네 미용실의 변화는 남성 시장에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남성을 공략 지점으로 커트 한 번에 5000원에서 7000원 사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고 있다.

이미 시내 미용실이나 브랜드점에서 단골로 확보한 여성 고객들은 더 이상 파고들 여지가 없는 데다 여성 파마나 염색에 비해 남성 커트가 회전율이 높고 원가도 싸다는 판단에서다. 지난해와 올해 젊은 층이 많은 경남대 앞에는 ‘남성 전용 미용실’이라 써붙이고 개업하거나 리모델링한 미용실이 세 개 늘었다.

◇ 뭉쳐야 산다

고급 이미지 단장·틈새시장 공략 등 타개모색

가맹비 부담이 너무 커 체인점은 생각지도 못한 동네 점포들이 뭉쳐 브랜드화한 사례로 ‘휴플레이스’나 ‘뷰티플렉스’ 등의 화장품 가게를 들 수 있다.

각각 태평양과 LG생활건강이라는 업계 1·2위의 대기업이 주축이 돼 체인점처럼 꾸민 것이지만 자사뿐 아니라 타사 대리점까지 섭렵했다는 점에서 동네 화장품 가게의 생존사례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경남대 앞만 해도 초저가 화장품점인 미샤와 더 페이스 샵(롯데마트 안), 뷰티플렉스와 휴플레이스가 몇 블록 떨어지지도 않은 지점에서 영업 중이어서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직거래 체인점에도 포함되지 않은 화장품 가게는 저마다 ‘전국에서 제일 싼 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우리도 싸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초저가 화장품 체인과 경쟁하기는 무리. 각종 경품과 덤 상품·무료 마사지 서비스 등은 필수 사항처럼 됐고, 손톱 손질이나 피부 테스트를 해주거나 자체 스티커를 찍어 스티커를 가져오는 고객에게 퍼프나 고급 견본품을 주는 행사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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