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우리나라에서도 성 범죄자에게 재범 방지를 위해 ‘위치추적 팔찌’를 씌우는 법을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실제로 몇몇의 나라에는 이미 성범죄자에게 그런 일이 시행되고 있다. 그것을 읽는 순간 끔직했다. 이미 한 40년전에 ‘징계사회’에서 ‘통제사회’ 로 대처해가고 있다고 경고한 질 들뢰즈의 이론이 새삼 옳게 느껴져서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을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하는 일”이라고 불렀다. 사유의 무능력이란, 기존의 것에 익숙해져 그것의 불합리나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기존에 ‘참’ 이라 여겨졌던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하고 비판하면서, 반면 그는 통상 ‘거짓’이라 불리면서 주변부로 밀려난 것들에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했고, 그 정당성을 제시하려 했다.

기존의 통제를 뛰어넘고자 약동하는 사유와 지향이 바로 ‘욕망’이다. 하지만 이런 욕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권력을 가진 자들은(여기서 ‘다수자’ 라는 개념을 씀) 소수자(억압받고 힘없는 대중을 표현함)들을 통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런 들뢰즈의 ‘통제 이론’은 푸코의 감옥이론에서 출발하고 있다. 개인은 하나의 닫힌 공간에서 규칙이 다른 또하나의 닫힌 공간으로 끊임없이 전전할 뿐이다. 우선 가정에서 학교로, 그 다음 병영으로, 그 다음 공장으로 또 때로는 병원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뛰어난 감금의 장소인 감옥으로 이어진다.

기계가 인간관계마저 통제한다면…

이것이 푸코의 감옥이론이라면, 이 감옥사회가 전반적인 위기를 맞아 변하고 있다. 학교를 개혁하고, 산업사회의 공장이 기업으로 대처되고, 입원에서 의사가 왕진하는 형태로 변하고 있지만 결코 통제에서 벗어 날 수는 없다. 통제사회는 제3의 기계들, 즉 정보기기와 컴퓨터 등을 통하여 작동한다고 보는 것이 질 들뢰즈의 ‘통제사회’ 이론이다.

이미 ‘통제사회’의 프로그램은 작동되고 있다. 전자카드, 전자목걸이, 기술에 적응하기 위한 자발적인 평생교육, 보너스나 성과급제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유죄선고를 받은 자를 정해진 시간 동안 자기 집에 묶어두는 전자목걸이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개인용 전자카드가 이동권을 제한하고, 사회적 활동여부를 결정하며 이 카드를 통해 권력이 언제 어디서든 시민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그런 통제체제,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과 같은 그런 사회가 실제로 도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앞으로 인간관계도 점차 변하지 않을까? 아마 사람들은 휴대폰과 더불어 위치 추적장치 센서가 부착된 팔찌 하나씩을 모두 착용하게 되지는 않을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 위치 추적장치의 팔찌 하나씩을 서로 주고 받으며 연애를 시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저항수단은 무엇일까?

질 들뢰즈는 ‘새로운 저항형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징계사회’에 적합했던 노동조합이라는 저항형태를 새롭게 혁신하여 통제사회에 적응시키든지, 아니면 새로운 저항형태를 개발할 것을 주문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통제사회의 작동원리와 본질을 정확히 알아낼 것을 지적한다.

   
/김숙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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