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별의 마을서 자신의 옛모습과 정사

모든 것이 뚜렷한 현실 세계에는 논리가 작용하고 누구든 얽매일 수밖에 없다.

현실 세계의 상징은 서울이었다. 누구나 가야 했고 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가기를 바랐다.

바닷가면서도 항구는 아니고 명산물도 없이 안개만 자욱한, 소설 속의 무진(霧津)은 서울의 반대편에 있다.

사람들은 무진이라는 꿈의 세계에는 잠시 다녀올 수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모두가 모호한 곳이다. 공상과 불면과 수음(手淫)과 편도선과 담배꽁초와 초조함과 폐병 등만 있을 뿐이다. 떠나지 못하는 모멸과 오욕으로 미칠 듯한 시절을 보낸 곳이다.

‘나’는‘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출세가 보장됐지만 크게 내키지는 않는다. 무진에 다니러 왔다가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여자를 만난다. 서울의 대학 출신이지만 배경이 보잘것없는 여자는 내게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서울로 데려가 주시겠어요.’사정한다.

나는 폐병을 앓던 옛날 하숙집으로 여자와 함께 가면서‘한 손으로 여자의 한 손을 잡았다. 여자는 놀란 듯했다. 나는 얼른 손을 놓았다. 잠시 후에 나는 다시 손을 잡았다. 여자는 이번엔 놀라지 않았다.’

집주인이 내준 옛날 그 방에서‘나는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처녀는 아니었다.’

일이 있은 뒤 여자는‘자기자신이 싫어지는 경험이 있었냐’고 물으며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반면 아내의 급전을 받은 나는 서울로 간다.‘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내 모습 같아 사랑한다. 연락하면 찾아오라’는 편지를 썼다가 찢는다. 버스로 무진을 벗어나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41년생인 소설가 김승옥은 소설문학의 감수성을 한 단계 높였다는 <무진기행 designtimesp=19103>을 64년 발표했다. 64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를 억누르기 위한 박정희의‘비상계엄’이 선포된 해다. 63년은 제3공화국이 출범한 해고 3년 전인 61년에는 60년의 4.19혁명을 군홧발로 밀어붙인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무진은 작가가 현실에서 망가졌을 때마다 스며들어 기력을 되찾으면 나오곤 한 소설 속의 공간인 듯하다. 작가는 아직 무진에 있는 것일까. 77년 제1회 이상문학상을 받은‘서울의 달빛 0장’을 쓴 뒤 20년이 넘도록 제대로 된 소설을 내놓지 않고 있다.

작가는 95년 전집을 묶어 내면서“80년 광주의 참극이 준 충격과 분노는 펜을 잡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손을 떨리게 했다”는 등의 고백을 한 바 있다.

그렇다면, 무진중학교에서 지금도 음악을 가르치고 있는 여자는, 작가가 일찌감치 예견한 자신의 분신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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