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는 한국사람이다”

   

“재미교포는 나라를 버리고 간 사람들이고 재일교포는 나라가 버린 사람들이다.” 재일교포 김경숙(59) 씨가 재미교포나 재일교포를 똑같이 여기는 한국사람들 생각의 문제점을 꼬집은 말이다. 대학 강연 차 입국해 27일 경남도민일보사를 찾은 그를 만났다.

활력 넘치는 모습에 나이가 믿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여장부다. 그는 지난 53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교포. 한국전쟁이 끝나자 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모은 자리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낭패를 당할까봐 부친은 일본으로 밀항을 했단다. ‘레드헌트’가 자행되던 시기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그때 부산에서 살았는데 일곱 살 때 가족들이 일본으로 먼저 건너간 아버지를 따라갔다”고 회상했다.

일본에서 고생한 부모님 덕에 그는 대학공부까지 마쳤고 남동생 둘은 모두 의사가 됐단다. 부친이 돈을 모은 건 오사카에서 파친코 사업을 하면서부터. 20년 전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그는 (주)KIM의 사장. 주간에 식품화학, 야간에는 인테리어학을 대학에서 전공했다는 그는 사업을 이어갈 뜻이 전혀 없었단다. 관심 있는 건 운동. 고교시절 키가 커서 농구선수를 했고 대학진학을 앞두고 운동을 그만둬 허리가 다쳐 시작한 게 볼링이었다. 한국볼링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60년대 말 70년대 한국 볼링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볼링 지도도 하고 각종 매체에 칼럼을 쓰기도 했단다. 또 당시 최초로 볼링방송을 했던 동양방송의 볼링 해설가로 활동했단다. 그 때 아홉 살 위인 김용길 고려대 의대교수(87년 암으로 작고)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서른 아홉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장사를 잘할 것 같다고 아버지께서 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안 하려고 도망도 다녔다”는 그는 어려움 없이 재미있게 일을 하면서 적자 한 번 안 냈단다.

독도문제, 교포들 가슴 아파…“한국 치밀한 작전 세웠으면”

그 정도 능력이 있으니 공식 직함도 많다. 재일한국상공회의소연합회 부회장, 오사카경남도민회 부회장. 그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도 자신이 그린 그림이 담겨있다. 탬버린을 흔들며 웃고 있는 가슴이 풍만한 노랑머리 여인 그림. 혹시 자화상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머리스타일이 비슷하니까 사람들이 난 줄 알고 오해하는데 나는 가슴이 그렇게 크지 않다”며 지난해 이탈리아의 한 카페에서 노래부르는 가수의 표정이 좋아서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명함을 많이 주고받지만 집에 오면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게 다반사인데 그렇다고 사진을 넣자니 멋쩍고 직접 그린 그림을 넣으면 절대 잊어먹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들었단다.

4년 전 오사카한국영사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그때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크게 실렸단다. “해방 후에 한국사람이 좋은 일로 신문에 그렇게 크게 나온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본 각지의 교포들이 전시회를 많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야기가 오고갈수록 그는 대단했다. 제대로 경영을 배우지도 않았지만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고, 화가에, 칼럼니스트에, 재일도민회 간부까지. 그의 직함은 한가지 더 있다. 3년 전부터 고려대 사범대학 전임교수, 경희대 체육대학 객원교수로서 강단에서 볼링을 가르치고 있다. “20년 동안 교포사회에 봉사를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상공회의소나 도민회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한국에서 봉사를 할 마음을 먹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도내 대학에서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단다. “학생들이 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사람들이니 옳은 생각과 정신을 갖도록 눈을 키워주는 게 나라를 돕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그는 매년 교수로 받은 월급을 장학금으로 내놓기도 했는데 올해는 경희대 학생 8명을 일본으로 데려가서 견학을 할 계획이다.

그가 지금처럼 한국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부친의 의지였단다. 일본아이들에게 맞고서는 집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부친은 자식들을 강인하게 키웠다. 일본에서 한국학교를 다녔냐고 묻자 그는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지원도 받고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지만 민단 쪽에 한국의 지원은 없었고 따로 학교도 없던 때였다”고 답했다.

교포 외면하는 조국 섭섭 “고국서 여생 보낼 수 있게 해야”

이야기는 교포사회로 이어졌다. 최근 독도영유권 문제로 악화된 한일관계 때문에 겪은 어려움은 없는지 물었다. 피부로 느끼는 불이익은 없다는 그는 “양 국가가 잘 지냈으면 하는데 내가, 교포들이 한국사람이기에 가슴 아파한다”고 말했다. 독도문제, 피는 한국인이지만 일본교육을 받았으니 마인드는 일본인이라는 그는 한국이 좀 더 신중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세계화시대에서 각 나라마다 실익이 연결돼 있는데 한국이 국민에게 이익이 되도록 치밀하게 작전을 구상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과격한 반일시위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호소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하는데 다른 나라사람들은 볼 때는 어떻게 이해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다음은 경제적인 문제. 한국사람들이 재일교포라면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로 인식하는 것을 지적했다. “재일교포 65만 여명 중에서 한국에 오고갈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겨우 300~400명이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은 재일교포라면 모두 부자라고 생각한다.”

재일교포사회와 한국의 교류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는 섭섭한 감정을 가감 없이 전했다. 서두에서 밝혔던 ‘재일교포는 나라가 버린 사람들’이라고 꼬집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했다.

한일회담 이후로 40년 동안 재일교포들은 모국을 찾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만들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나무심기운동을 벌였다. 오랫동안 나무를 심어왔지만 “도민들, 한국사람들은 너무 모른다”고 그는 섭섭해했다. 태풍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재일교포들은 성금을 모아서 보냈단다. 일본도 경제위기로 회사가 망하고 구조조정으로 어려운 때지만 모국을 위해, 고향을 위해 돈을 모아 보냈는데 한국은 받는 것을 잘 받고 돌려 줄줄 모른다고 꼬집었다. “교포들이 돈이 많아서 성금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일본에는 지진, 태풍 피해가 나도 아무런 화답도 없다. 화가 난다.”

그는 이것만은 조국이 꼭 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일본에 자식도 없고 늙어서 오갈 데 없는 교포 1세대들이 많은데 이분들이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양로원이라도 지었으면 한다.”

사진/유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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