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문화 발달 → 일 정치세력 접근 →해양교류 중심지로

이재현 대성동고분박물관장 22일 ‘가야학술회의’ 서 주장

“가야는 고대해양 교류의 중심지입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와 함께 제4의 제국으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가야가 고대 해상교류의 중심지라는 주장이 제기돼 2000여년 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찬란한 문화를 구축했던 가야의 제해권에 대한 새 조명과 논쟁에 불을 당겼다.

당시 찬란한 문화를 구축했으나 변방세력으로 평가절하 됐던 가야가 지난 1980년대 이후 유물들이 속속 발굴되면서 고구려 신라 백제에 못지 않은 또하나의 세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22일 오전 김해시 대성동 김해박물관 강당에서 ‘가야의 해상세력’이라는 주제로 열린 ‘제11회 가야학술회의’에서 이재현 대성동고분박물관장은 ‘금관가야의 성장과 대외교역-해상 교역로의 변화를 중심으로’란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관장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기록된 일본이 낙랑대방군과의 교역항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김해지역이 철기 및 청동기 생산과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새로이 형성된 항로이다” 며 “기원전 3세기에는 해류를 이용하여 일본의 규슈지역과 전라남도의 직항로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이에따라 “김해지역이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대마도가 항로의 중간 기착지로 부상됐다” 며 “그리고 약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2, 3세기 무렵에는 서해와 남해지역의 여러 정치체가 성장하면서 항해방식이 변화되었고 동해안을 이용한 항로가 활성화 됐다”고 말했다.

또 “가야는 동해안 교역로를 통해 3세기 후엽부터 낭랑군이 멸망한 4세기까지도 북방의 선진문화를 지속적으로 수입할 수 있었다” 며 “그를 통해 가야는 남부지역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김해가 이런 불리함을 극복하고 해상교역의 중심지가 된 것은 철기와 청동기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문화적 선진지역이 되자 일본의 정치세력들이 자연스럽게 접근한데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기록된 서해안~전라도~남해안~김해~대마도~북규슈의 항로는 해류에 따른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철과 청동제품 교역의 필요에서 생긴 새로운 항로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이 항로는 가야가 전성을 이루는 시기에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지만 금관가야가 쇠퇴하는 5세기 이후에는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박승규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소가야국의 토기변동과 대외교섭’, 허재혁 부산대 교수가 ‘포상팔국 전쟁의 원인과 성격’, 노중국 계명대 교수가 ‘가야의 대외교섭 3~5세기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으며 참석자들의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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