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쯤 이야기다.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어떤 검찰간부에게 ‘인사이동이 잦은데도 곧잘 새 임지에서 사건수사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초면이라 별달리 화제가 없던 터라, 립서비스 차원에서 그냥 던진 말이었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지역실정을 훤히 알게 해주는 투서가 잘(?) 들어오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다.

“투서 많아 어려움 없어요”

”농이 섞인 말이었지만, 얼마나 투서가 많기에 하는 생각을 한동안 지우지 못했다. 그런지 몇 년 후 지역에서 꽤 알려진 사람이 정부요직에 등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이 소문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속으로 ‘경쟁자가 많았나 보다’하고 말았다. 시간이 한달가량 흐른 후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을 음해하는 익명투서가 수십건에 달해 청와대가 마침내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기자가 알고 있기로 현재‘익명투서’에 기대어 공식적으로 일을 벌이는 기관은 없다. 또 그래서도 안된다. 하지만 익명투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누구라도 입수만 하면 뚜껑을 열어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과거형으로 이야기를 한 탓에 익명투서를 ‘지금은 사라진 구습’으로 여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익명투서는 지금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채 누군가를 겨냥하고 있다.

익명투서가 나도는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 투서작성자들은 통상 ‘국가와 지역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단다. 하지만 내용을 읽다보면 남 잘되는 꼴 못 봐주겠다는 심보가 가득 묻어난다.

둘째는 ‘상대가 이룩한 지적 사회적 성숙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이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다소 사그라들었다곤 하나,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는 ‘어린 시절’이었다.

흔히 나돌던 말로 “그 친구, 어릴 때 공부 잘했는데!”가 있다. 한번 우등생이면 죽을 때까지 우등생 대접을 받는게 현실이었다. 그러다보니 소년시절 덜 떨어진(?) 친구가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대뜸 나오는 반응은‘그럴리가?’였다.

그래도 지방인재 나타나야

두가지 큰 이유를 정서적인 어투로 바꾸면‘질투’가 된다. 이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똬아리 틀고 있는 겸양의식 탓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잘 난듯 설치는 인간은 존경할만한 부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일정부분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괄목상대’의 주인공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건 부당하다. 애써 이룩한 지적 사회적 성취가 있는데도, 그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을 주저하게 된다면 이는 사회적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그 기량을 대략 알 수 있는 인간관계로 촘촘히 엮이다보니, 지역사회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중 도드라지는 부작용은 바로 질투로 표현되는 음해성 투서다.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다보니 클 사람이 제대로 크질 못한다. 인재가 나타나질 않는데, 어떻게 지역사회 발전을 견인할 재목을 찾겠는가?

지난 20일 회사에서 만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도‘나서면 정맞고,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이런 풍토 때문에 정부가 지방인재를 찾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고 실토했다.

그래도 그는 지방인사 추천이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며, 자신을 지방인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터넷사이트 ‘삼고초려’에 신상과 장단점, 공과를 프리젠테이션 해줄 것을 당부했다. 비밀이 보장되는 이 사이트에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활용함직 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그 이름이 노출되더라도 과연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사이트 마냥 조용할 수 있을까? 전례를 보면 당장 뒷말과 익명투서가 줄을 이을게 뻔하다.

정부관계자들이 이런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괜찮다며 지지를 보낼까? ‘꼬시래기 제살 뜯어먹는’악습을 없애지 않는 한 지역발전은 거친 험로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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