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밑 몇센티 규정을 어긴 어른 같은 덩치의 학생이 야단을 맞는다. 툭툭 쥐어박히고, 욕도 듣는다. 학생의 얼굴이 벌겋게 변해간다. 하얀 운동화 신으라는 규정어기고 무늬있는 운동화신은 여학생도 걸린다. 야, 누가 니맘대로 무늬있는 거 신으랬어, 하는 윽박지름이 꽂힌다.

문제아는 학교 탓

반양말 신은 학생, 색깔다른 가방 멘 학생도 마찬가지로 교문앞에서 굴욕적인 소리를 듣는다. 이유는 단 하나. 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정문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궁금하다. 교사들은 머리가 조금 더 길면, 무늬있는 운동화신으면, 문제아가 되기라도 한다고 여기는가. 교칙이라서 그러는 것이라고 답할까. 그렇다면 학생들을 오로지 통제하고 관리하는 목적으로 마련된 구닥다리 교칙을 지금 시대에 맞게 손질하면 되지않을까. 공부하는 학생이 쓸데없이 개성이 다 뭐야, 라고 할까. 도대체 쓸데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교사들은 깨달아야 한다. 사소한 자율까지 통제해야만 학교로서 기능한다고 여기는 전근대적 사고야말로 우리사회를 병들게하는 주범임을. 19세기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도 <자유론>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않는데도 상대의 개성을 억누르거나 무시하는 것은 독재’라고 했다. 말하자면 복장검사도 큰 틀만 정하고, 나머지는 학생들 자율에 맡기는게 옳다는 얘기다.

한데 정반대다. 창의성(=개성)이 중요하다고 수업시간에 강조하면서, 학교생활속의 창의성은 없다. 아예 없다. 사회책속엔 민주화 과정도 나오고, 민주시민에 대해 언급도 하지만 정작 민주학생이 되는 기회는 차단되어있다. 학급토론시간조차 없다. 반장이나 학생회는 학생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교사들의 일방적인 지시를 전하는 충실한 전달자일 뿐이다. 입시쪽에 초점을 맞춰도 학교의 행태는 도통 불가해한 것 투성이다. 논술비중높아졌으니 독서하라면서 야간자율학습시간 책읽으면 뒤통수 때린다. 그 시간엔 영어 수학만 하라는 게다.

교사가 변해야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공부말고 학생들 칭찬하는 교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 늘, 니가 그렇지뭐, 공부도 못하는게, 하는 말만 듣고 지낸다면 있던 자질도 사라질 판이다. 멀쩡한 사람도 주기적으로 비난하면 바보된다고 했다. 한데 민감한 성장기의 학생들은 어떨 것인가.

학생들로부터 전해들은 바로는 오히려 학교가 문제아를 만든다고 밖에 할 말 없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눌리는 비겁자가 되거나, 아니면 튀어버린다. 그게 문제아다. 그 다음 학교는 전학가라고 종용한다. 말 잘 듣고, 공부잘하는 학생 머리만 쓰다듬겠다는 게다. 1978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도 학교가 어떻게 문제아를 만들어가는지 잘 나와있다.

모범생 현수가 학교를 자퇴하기까지의 과정이다. 70년대 얘기다. 한데도 그것은 세계화니, 국제경쟁력이니 하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군대도 바뀌는 세상인데.

중요한 건 학생들 정서가 용납않는데 학교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데 있다. 요즘 애들은 자신의 인권이 얼마나 소중한지 누구보다 잘 안다.

때문에 납득가지않는 억누름에 수긍않는다. 당연히 교사들염려대로 어딘가로 튈 가능성도 높아진다. 학교가 그렇게 만든다. 그래놓고 학교는 문제아가 가정 탓이라고 할 지 모른다. 단언컨대 학교 탓이다.

결론은 교사들의 사고가 대대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학교의 주체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에어컨도 없는 한여름, 학생들은 땀 뻘뻘 흘리는데 에어컨 빵빵한 교무실 있다와선 야, 추우니 창문닫어 하는 교사가 발붙이지못한다. 한겨울 난방도 안되는 교실에서 애들은 떨고있는데, 교사는 발밑에 난로켜놓고 수업하는 진풍경도 없어진다.

학생은 더 이상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전근대성을 벗지않고는 공교육의 미래는 없다. 경쟁력도 없다. 군대보다 더 긴 6년의 민감한 중고교시절이 ‘끔찍한’것이 아닌, 참된 사회인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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