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알고 보니...]하청일 조합원(자치행정부)

노보팀에 있어서는 두가지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취재하기 쉬운 사람과 취재하기 어려운 사람. 이번 하청일 조합원의 경우 후자에 속한다. 얘기의 대부분을 비보도를 전재로 한다.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걸까? 비보도는 지키되 최대한 그 범위를 넓혀 지면에 닮았다.
인터뷰는 4일 저녁 모 조개구이집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사소통 부재로 인해 이틀뒤 한차례 더 인터뷰를 가졌다.

하청일 조합원의 경우 90년 11월 경남신문에 입사해 98년 7월 퇴사 했다고 한다. 자연스레 그 조직과 우리 조직에 대한 비교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을터인데,그는 이 부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워 하며 극도로 말을 아꼈다.

“내가 그 당시 있을때와 지금은 시간도 많이 흘렀고 변한게 많다. 그런데 내가 가진 그때의 향수만 가지고 판단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전 조직에 오래 몸 담았음에도 도민일보 조직에 잘 융화되고 있는것 같다는 말에 하 조합원은 “그것은 내 전략이다”며 단호히 말한다. “새 조직에 와서 융화되기 위해 이전 조직의 느낌을 안 풍기려는 것, 그것은 당연한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 조합원은 도민일보 입사전 일종의 공백기를 거쳤다. 즉 기자라는 업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복귀했는데 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하지만 그 공백기에도 일종의 기사를 생산하는 일과 관련된 일을 해 왔기에 큰 두려움은 없었다.”

혹시 도민일보에 와서 후회하는 점은 없는지 질문을 던졌다. “경제적인 부분은 이미 다 알고 왔는데 그런건 전혀 없다”며 질문한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하지만 이 연장선상에서 계속 질문을 던졌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아내와 마찰 같은 것은 없는지에 대해…. “돈은 아니고 오히려 술 때문에 그런게 많다. 요즘은 그렇게 늦게까지 안 마시고 되도록 일찍 들어가지만 예전엔 그런 부분에서 마찰이 많았다.”

하 조합원은 늦게는 들어갈 지언정 외박은 절대 NO!! 마산이 집이면서도 노보편집실장과 동거하다시피 하는 본 편집차장으로서는 얼굴이 달아오른다.
이날 자리에는 하청일 조합원, 편집실장, 편집차장, 그리고 객으로 김범기 조합원, 이렇게 남자 4명이 함께 했다. 이런 자리에서 연애사가 빠질수 없는 건 당연지사.

“인연이란게… 군대에서 몸을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날 지금의 아내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내는 내가 다친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 편지에는 건강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게 바로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처가라는 주위의 평에 대해서 그는 “좋은 말 아니냐? 그것은 곧 가정적이라는 얘긴데 좋은 얘기다. 그렇지만 실제로 난 그렇진 않다. 잘못 알려진 것이다”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하 조합원은 아내를 부를때 ‘여보’라는 말이 쑥쓰러워 ‘아요~’,‘어이~’ 뭐 이런식으로 부른다고 한다. 아내 역시 특별한 호칭 없이 두리뭉실하게 부른다고 한다. 전형적인 경상도 부부의 모습이다.

“언제 한번 아이들에게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식사를 한 후에 꼭 엄마에게 잘 먹었다는 얘길 하라고. 사실 우리가 식당서도 밥 먹고 나오면서 잘 먹었다는 얘길 하면서 집에서는 안한다는게 우습지 않나? 그래서 요즘은 애들과 나 스스로 밥 먹고 꼭 그 말을 하려고 한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리 조합원 모두 오늘부터 실천들 해 보시라.

하 조합원의 경우 불혹을 넘긴 나이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술 먹고 몸 안챙기는 것 같아도 은근히 몸 많이 챙긴다. 요즘도 위암의 주 원인인………” 건강에 대한 열변을 토해낸다. 아마 이런 몸 챙기기에 대한 열정이 실제 건강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연대별 화두에 대해 던져 보았다. 먼저 10대. 그런데 냉큼 “싸돌아 다니며 노는거지 뭐, 특별한게 있나”라며 “그렇다면 당신은 뭐였냐”며 되레 질문을 던진다. ‘내 안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등등 거창한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사뭇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가식 없는 솔직한 답변이었다.

하 조합원은 학창시절 어땠을까?
“사고를 치는 문제아도 그렇다고 학구파도 아니었다. 시골서 유학온 나로서는 어떤 도시 친구들 같이 학원을 다닐 여력이라든지 그런 분위기 조성이 될래야 될수가 없었다. 시골서 흙 묻히며 놀다온 촌 사람들이 학원까지 다녀가며 학구적인 분위기 조성이 되겠는갚그렇다면 20대의 화두는 뭐였을까?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선 학생운동을 통한 민주화였다. 학보사 활동을 하면서 민주화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 조합원은 경남대 학보사 84학번 출신이다. “결국 6∙29를 이끌어낸 뒤에야 뒤늦게 군대를 갔다”고 한다.

아~, 민주화를 이끌어낸 뒤 군대를 갔다…. 아름다운 민주투사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30대, 그리고 40대의 화두로 이어진다. “뭐 다들 비슷한것 아닌가? 30대에는 직장인으로서, 기자로서 빨리 적응해 가는 것이었고, 지금 현재 40대엔 가정,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 문제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렇다. 모두가 그렇게 그 나이에 맞게 비슷한 고민을 하고, 또 그렇게 비슷하게 살아 가는가 보다.
후배 조합원들에게 한 마디를 당부했다. “뭐 내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다고, 나도 배워가는 입장인데…”라며 할 말이 없는 듯 했다. 침묵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하자 한 마디 던진다. “우리 조직원 구성이 젊다. 그 젊음이 좋을 수 있지만 그런 만큼 생각이 단편적일 수 있다. 그런 부분을 잘 유념했으면….” 불혹을 넘긴 선배다운 날카로운 충고다.

마지막으로 기자로서의 최종목표를 물어봤다. “어떤 자리에 대한 목표는 따로 없다. 자리 보다는 전문적인 기자, 대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그 목표를 향해 그의 변함 없는 하루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글/남석형 노보편집차장
사진/김구연 조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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