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예학에서 말하는 ‘정신’의 뜻은 “살아 있는 실체이면서 이념적인 자기 지향성을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가치롭다고 여기는 자아 혹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변화하면서 나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김춘수의 삶과 문학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이루기 위한 거듭나기의 몸짓이 있다는 것이며, 정신이 올곧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신념 체계를 지니고 산다는 것이다.

작고하신 스승께서는 봄날이 되어도 싸늘한 기운이 남아있는 인문과학관 강의실에서 문학정신의 정의를 내리고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전제 아래, 일례를 김춘수의 삶과 문학에 견주어 말씀하셨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대학에 진학하였다가 사상혐의를 받아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의 모진 고문을 받고 급기야 퇴학처분을 받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고향 통영에 쓸쓸히 돌아온 김춘수의 젊은 날, 좌절과 절망의 끝자락에 1교시는 끝났고 교정에는 벚꽃이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문득 광복이 찾아왔고, 이제는 좌익과 우익의 틈서리에서 김춘수에게 다가선 명제는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이데올로기이고, 이념은 거짓이며 폭력”이라는 것, 따라서 타락하고 단절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허위 혹은 왜곡된 이미지라는 정신 아래, 그는 때묻지 않은 순결한 이름 모를 꽃이 지닌 슬픔을 말하고 가장 순수한 사물의 세계가 세상에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즈음에 2교시는 끝났고, 봄날의 하늘은 너무도 맑았다.

끝없는 자기정체성의 질곡에 〈처용단장〉13편이 탄생되고, 드디어 우리나라 순수시의 거목으로 굳건히 올라서게 된 처절한 그의 몸짓에 문학은 참으로 위대함 그 자체였다. AC

그러나 민주정의당 창당과 더불어 문화예술인을 앞세운 독재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정치판에 전국구 국회의원 배지를 단 김춘수의 이야기에 참으로 아뜩하였다. 엄청나게 많은 이들의 심금에 당신이 아로새긴 순수 그 자체, 그 지고한 문학정신을 독재 권력에 팔아버린 그대 앞에 절망해버린 3교시는 끝났고, 며칠 후 황사바람이 천지에 가득하였다.

그 후, 오랜 기간동안 나에게 있어 문학은 문학정신이라는 빗장으로 질러져있게 되었다. 그러나 내 안에 무수한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내가 있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허랑한 나를 끝없이 목도하면서 문학정신은 참으로 기나긴 가위눌림 그 자체였다. 더욱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뇌리에 박힌 사르트르의 ‘진정성’이라는 말 앞에서 더욱 까마득하게 절망하였다. “상황에 대해 참되고도 명료한 의식을 가질 것.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과 책임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 그러나 자유와 책임은 부끄러움을 인식하는 순간만 잠시 반짝거릴 뿐, 이내 뻔뻔스러운 자기 변명 혹은 자기 지시적 시선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 수 밖에 없는 것. 사르트르마저도 인정한 바 있듯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끝없는 유죄라는 것.

‘문학인’ 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

결국 나에게 주어진 결론은 문학이 위대한 것은 문학정신의 위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학에서만큼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지 않는다. 문학은 썩어 가는 주검, 그 욕망의 살점을 파먹고 날아오르는 까마귀와 같다. 바타이유의 말처럼 “문학은 결백한 것이 아니라 비난받아 마땅하며, 문학은 끝없이 스스로의 유죄에 대한 변호이다.”(〈문학과 악〉책머리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절망하고 무기력해지며 알코올에 찌든 회한이 가득한 것을 운명처럼 때로는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던 수많은 문학가들 앞에 서서 나는 더 이상 문학정신이라는 섣부른 잣대를 가지고 그들을 폄훼하지 않을 것이며, 내 자신 그럴만한 존재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 늘 밝은 양지만을 쫓아다니며, 힘있는 자의 편에 서서 아유의 명문장으로 세상을 낙락하게 누려왔던 문학인을 ‘문학인’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나의 무지함 때문이리라.

/이성모(문학평론가∙마산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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