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다.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다. 집에 와서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을 먹고 잤다.” 30년 전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이 이상의 쓸 거리가 없었던 것도 아닐 터인데 대부분 표현이 이런 식이다.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꼭 해야만 했던 ‘일기숙제’였으니 얼마나 일기쓰기가 작위적이었는지 눈에 선하다. 그런데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의 일기를 보면 수준이 다르다.

‘일기검사’라는 교육의 결과인지 몰라도 가족의 일상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친구들과 있었던 일에 자신의 감정도 잘 표현하고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가 “초등학교 선생님의 일기 검사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의견을 내면서 논란이 분분하다. 학생들의 표현력과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일기 검사를 찬성하는가 하면 아동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측면에서 반대하고 있다.

아이에겐 오히려 표현의 제약

나 역시 평소 일기는 가장 적절한 글쓰기 연습이라고 생각했기에 문장력을 키우려면 일기검사를 통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아이도 그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문장력이 나타나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나는 국가인권위의 발표를 들으면서 낯이 뜨거웠다. 내 아이의 자유의식을 내 방식대로 지금까지 통제해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아이의 일기장을 펼쳐 본 것도 혹시 맞춤법이 틀린 곳이 없나, 문장이 어색한 것은 없나. 글씨는 예쁘게 잘 썼나 하며 보아온 것이었는데 그것이 아이에겐 표현을 제약해온 것이 되었으니.

올 초에 아이가 “아빠, 나도 비밀일기장 하나 사 주세요” 했을 때 ‘이제 저만이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 있을 나이구나’ 생각은 했지만 매일 쓰고 있는 일기장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구나 하는 것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까지 아빠에게 검사받고 학교에 가선 선생님께 검사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아이도 생각했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 선생님이 일기를 검사하는 것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검사받기 위한 일기는 일기가 아니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아이가 쓴 일기는 그야말로 누구나 다 보아도 상관없을 생활문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미사여구를 적절히 갖다 붙여 그럴듯하게 표현은 하고 있지만 가족의 비밀도 들어있지 않고 자신의 비밀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도 보고 선생님도 보니 그런 것을 적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그러기에 따로 비밀일기장을 사달라고 했을 터이다.

가족 구성원 인격까지 침해

올해부터 아이가 비밀일기를 따로 쓰고 있는지는 아직 확인을 하지 않아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다. 어려서부터 숙제용 일기 따로 쓰고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한 일기를 따로 쓴다면 ‘이중장부’를 만드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런 기우도 기우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아이가 마음껏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혼자만의 영역인 ‘일기장’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로서도 아이의 일기장을 학교선생님에게 보인다는 것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아이는 느끼지 못하고 쓰지만 숨기고 싶은 가정사가 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 검사는 단지 아이의 인권만 침해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 구성원의 인격마저도 침해받을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일기 검사를 찬성하는 일부 학교 선생님들로선 국가인권위의 권고나 나와 비슷한 논리의 반대 주장에 서운함이 있을 수 있겠다.

순수하게 아이들의 문장력을 키워주기 위한 교육과정의 하나인데 인권 운운하며 마치 아이의 인권을 짓밟는 사람쯤으로 취급받는다고 느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른들의 생각에 앞서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일기검사가 얼마나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기 검사가 단지 학생들의 문장력 향상을 위한 교육일환이었다면, 이왕 국가인권위의 권고가 나온 만큼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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