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가. 어쩔 수 없지만 경쟁은 필요한 것인가. 나는 심리학자도 아니고 사회학자가 아니라서 경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또 그 원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40여 년 이 땅에서 살면서 아주 어릴 적부터 경쟁이란 소중한 가치이며, 경쟁에서 뒤처지면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지면 안 된다고 듣고 배우며 자랐다. 시험 칠 때는 나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가 미웠고, 운동회 땐 달리기 잘하는 친구가 미웠다. 식구들은 그것도 못 하냐고, 비싼 밥 먹고 제대로 하는 게 뭐냐고 질책했다. 할 말이 없었다. 나로선 하느라고 했건만 안 되는 걸 난들 어떡하나.

그래서 한심한 내가 미워졌지만, 친구는 더 미워졌다. 쟤들이 없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친구를 미워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보면 괜히 주눅이 드는 걸 보면 아직도 그 시절의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시합의 모순

내가 경쟁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은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였다. 자만에 빠진 토끼가 달리기 시합 중에 낮잠을 자다가 그만 거북이에게 질 뻔했다가 거북이와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성실’의 의미를 전하는 이야기지만 매우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거북이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당연히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달리기 시합 자체의 모순이었다. 육지의 토끼와 바다의 거북이는 애초에 경쟁이 성립되지 않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물 속에 오래 있기’경쟁을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 거북이가 이길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토끼가 나은가, 거북이가 나은갗라는 질문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리고 이렇게 전혀 다른 대상을 하나의 잣대로 능력을 판단하고 존재 가치가 평가된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경쟁이란 그 속성상 배제의 논리가 개입하게 된다. 따라서 경쟁의 논리로는 이 둘의 가치를 모두 긍정하기 어렵지만, 개별적인 존재로 접근하면 둘 다 소중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학교 현장은 토끼 같은 아이도 있고, 거북이 같은 아이도 있다. 이 아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이나 잠수하기 시합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을 만들 것이고, 이 시합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면 서로를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다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들에 나가 같이 놀기를 시킨다면 어떨까. 토끼 같은 아이는 더 이상 자만심에 가득 차서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

엄격한 선생 편안한 선생

오히려 거북이 같은 아이에게 육지 세상의 신비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고, 온갖 아름다운 풀이름과 향기롭고 시원한 과일 이름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덫에 걸리면 위험하다는 주의까지 곁들인다면 아마도 거북이 같은 아이는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육지 세상을 맘껏 구경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거북이 같은 아이의 등에 업혀 바다를 달리는 토끼 같은 아이는 또 얼마나 신비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인가. 거북이 같은 아이는 얼마나 신이 날 것인가. 자, 이 아이들에게 시합을 시켜 서로를 미워하게 할 것인가, 서로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서로를 아껴줄 수 있도록 안내해 줄 것인가.

아주 엄격해서 어려운 교사도 있고, 누나 같이 편안한 교사도 있다. 꿈을 소중히 여기게 하는 교사도 있고, 학습능력 향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도 있다. 어떤 교사가 유능한 교사이고, 어떤 교사가 무능한 교사인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교사가 있다면 그는 참 유능한 교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교사가 이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또 이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정일 수밖에 없다면 방법은 무엇일까. 교사간의 경쟁을 높이면 될까. 아마 교육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교육부에 충고 한마디하고 싶다. 그렇게 경쟁 시켜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혹시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교사들까지 왜 올라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예쁜 나비의 꿈도 알지 못하고 오직 꼭대기를 향해 다른 애벌레를 타고 짓밟으며 오르는 애벌레로 만들고 싶다는 것인가.

엄격한 교사는 편안한 교사가 있을 때 더 빛이 나고, 또 엄격한 교사가 있어야 편안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도 설 수 있다. 그래야 교육도 더 잘 될 수 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이 교사들 모두 필요하고, 또 모두 있어야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육부는 어떻게 생각할까. 문제는 교사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책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학교운영시스템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교사들 모습은 어떨까.

“김 선생, 재훈이 좀 혼내 주세요. 제 말은 영 안 듣고 수업 시간에 장난만 쳐요!” “이 선생님, 재훈이 녀석 좀 달래 줘요. 좀 꾸중했더니 그만 울어 버리네, 그것 참. 이 선생님 특기 살려서 부드럽게, 응!” “변 선생, 뭐 좀 재미있게 수업하는 방법 없을까, 변 선생 전공이잖아?” “김 선생, 학생들 스스로 환경미화를 제대로 하게 하는 방법 없을까?”

/양태인(전교조 경남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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