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환 태식 외 주변 캐릭터맛 깔스런 배치, 보기에 편해”

영화와 만났을 때 마냥 솔직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감동이 밀려오는데 옆 사람 눈치가 보여, 혹은 영화를 분석적으로 볼 줄 모른다는 핀잔을 들을까봐 눈물을 아끼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살짝 밝히자면 기자는 단편영화시절부터 류승완 감독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이유로 이번 ‘관객과의 대화'를 류 감독의 신작 <주먹이 운다>로 정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 영화는 충분히 관객들과 ‘설(說)'을 풀만한 가치가 있었다. 풀려나가는 ‘설'을 보면서 그 가치의 비중은 독자들이 판단해보시길.

영화 <주먹이 운다>의 한 장면
이번 대화마당에는 창원시립치매요양병원 가정의학과 공중보건의로 일하면서 1년 전부터 권투에 푹 빠져 사는 정환석(32)씨와 자칭 문화백수이자 류승완 감독 영화마니아라는 이원희(30)씨가 참가했다. 세 사람은 지난 5일 다소 긴 시간동안 류승완 영화의 또 다른 모습에 빠져 호흡을 함께 했다.

-영화를 갓 보고 나서, 이성이 아닌 감성에 기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영화에 대한 느낌은 어떠했는가.

   
△정환석 = 2시간 13분이 금방 갔다고 느낄 정도로 재미있었다. 특히 류승범(유상환 역)의 얼굴표정연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최민식(강태식 역)도 이에 못지 않았다. 요즘 권투를 배우고 있어서 그런지 두 배우들이 이걸 찍으면서 ‘진짜 고생 많이 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제법 폼이 나오더라. 실제 스파링을 하면 1라운드 3분을 견디는 것도 무척 힘든데, 6라운드나 되는 장면을 찍기 위해 권투연습을 상당히 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봤는데, 권투장면은 <주먹이 운다>가 더 잘 그린 것 같다.

△이원희 = 영화관에서 태어나서 처음 본 영화가 권투영화 <챔프>(1979년, 감독 프랑코 제페렐리)였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그 영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평소 스포츠 영화에 대해 다소 거부감이 있다. 항상 천편일률적인 휴매니티, 인간승리를 그리고 있다.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결말 때문인지 그런 영화들을 보면 불편했다. 이 영화는 거부감이 아니라 스스로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갔다.

-강태식은 신인왕전을 준비하면서 ‘끝까지만, 6라운드까지만 견뎠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권투를 직접해본 입장에서 이 말의 의미를 새겨본다면.

△정 = 솔직히 난 완전히 초보다. 1년 전 시작해 몇 개월 전에야 겨우 3라운드를 뛸 수 있었다. 일주일에 4일 체육관에 가서 하루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 운동을 한다. 요즘은 일주일에 1~2번은 스파링을 하고. 1라운드는 체력이 돼 어떻게 견딜 수 있다. 하지만 2라운드 중반이 넘어서면 너무 힘들다. 라운드가 끝나기 30초전 예비 종이 울리는데, 경기 중반에 그 소리가 너무 듣고 싶다. 3라운드 직전 쉬는 30초 동안 ‘제발 3라운드를 알리는 종이 울리지 않았으면'하고 기대한다. 그만큼 3분, 3분이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근데 40살인 태식에겐,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시합에서 견디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경기와 달리 자신이 지치면 상대에게 결국 맞게 되니까 견디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권투초보 입장서 보니 경기장면 잘 그린 것 같아”

   
△이 = 나도 중학교 때 권투를 할 뻔했다. 중학교 때까지 동네에서 제법 싸움 꽤나 했다. 근데 하루는 한 친구에게 지고 집에 들어왔다. 이 모습을 본 아버지가 “권투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시길래, 갑자기 싫어졌다. 그때는 그맘때 누구나 가지고 있을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으니까.

-가장 재미있게 본 장면을 말해본다면.

△이 = 스포츠 소재 영화답지 않게 자연스레 영화에 빨려 들어갔다고 했는데, 캐릭터를 참 맛깔스레 배치한 것 같았다. 상환의 아버지(기주봉 분)가 원래 감지 않는 상환의 레게머리를 보고 “머리는 감았냐”고 묻는 부분, 교도소에 있는 상환에게 면회를 가서 기껏 말하는 게 “군대갔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군대있을 때는…”이라는 부분, 빵과 우유를 사식으로 넣어주면서 “군대있을 때 생각나서 단 것 좀 넣었다”는 부분과 태식이 결승전을 앞두고 떡볶이를 먹는 어린 아들에게 “누가 빚보증 서달라면 절대 하지마. 대신 있는 돈 그냥 줘”라든지, “아빠, 튀김 좀 먹으면 안돼?”라고 묻는 아들에게 “걱정마, 아빠 절대 안 죽어”라고 동문서답말하는 부분은 재미있게 잘 대비되었다. 그렇게 서로 욕하면서 아내와 섹스를 하는 태식과 아내, 계속 해서 돈을 떼이면서도 원태를 끌어안는 원태와 태식, 무관심한 척 하지만 손자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는 할머니와 상환의 관계 등도 눈에 띈다. 마지막 단 한번 링에서 마주하는 상환과 태식이라는 중심인물 외에 감독이 다른 인물들에게도 적지 않은 시선을 던져줘 보기에 편안했다.

△정 = 나는 상환이 교도소에서 싸우는 장면이 가장 재미있었다. 류승범이 연기를 잘해서인지 ‘정말 독종이구나, 저 정도면 충분히 신인왕전 결승에 갈만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승전에서 무승부가 났다면 시시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동네 양아치에게 돈 뺏는 장면도 정말 현실감 있었다.

△이 = 류승범이 형 류승완 감독의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배우로 뜨기 전에 실제 강북 2류 나이트에서 DJ 했다고 알고 있다. ‘아 역시 해본 가락이 나오는 구나'라고 생각되더라. 더욱이 상환이 동네 양아치에게 돈 뺏는 생 양아치인데, 진짜 리얼하더라.

-물러설 곳 없는 두 사람이 결승전에서 맞붙는 장면이 꽤 흥미로웠는데. 어떻게 보았는가.

△이 = 가장 압권이었다. 처음 두 사람을 화면에 담을 때는 광각렌즈를 썼는지 무척 떨어져 보이더라. 그런데 나중에는 망원렌즈를 썼는지 서로가 무척 가깝게 보이도록 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승패를 떠나 링 안에서 서로의 아픔을 공유한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삶의 무게를 극복했다는 메시지는 담겨있지 않은 것 같다. 액션을 위해 이야기와 인물을 끌어들이던 감독의 기존 영화스타일과 달리 이야기꾼으로 발전해가는 류 감독을 보는 것 같아 기뻤다.

△정 = 마지막은 두 사람의 아픔을 폭발시켰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희망을 전달한 것 같다. 그리고 이미 결승전에 올랐을 때 두 사람은 그 아픔을 최소한 링 안에서는 극복한 것으로 보였다. 이후 전개될 삶은 더 비참할지 모르지만.

근데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 태식의 건강이 너무 걱정되었다. 혈관성 치매로 보이는 할머니의 건강도 그렇고. 만약 내가 영화에서 나오는 태식을 검진한 의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몸 건강만 유지하고,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않고 현실에 타협해 살게 할지, 건강을 해치더라도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으려는 태식에게 운동을 하라고 할지 상당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그냥 환자라면 도시락 싸가지고 운동 못하게 말렸겠지만, 태식의 사생활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과연 어떻게 했을지. 영화 보는 내내 내게 던져진 물음이었다.

도움/창원 CGV6

/글 이시우·사진 박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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