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저기서 앞 다투며 고운 빛의 꽃망울이 터지고 연둣빛 새잎이 비죽비죽 솟는 자연의 화사함과 나른한 기운이 우리의 눈과 몸을 호리는 계절입니다. 할머니 댁 뒤란 햇빛 바른 곳에서 사금파리에 꽃이랑 풀이랑 담아 소꿉놀이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깨진 그릇의 초라함을 화려한 꽃잎이 대신해 주어 부자가 된 것 마냥 풍족하고 즐거웠습니다. 어쩌다 빛깔 곱고 잘 깨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용기를 얻으면 서랍 속에 귀하게 간직하곤 했습니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플라스틱 소꿉놀이는 부러움에 대상이었고 함께 놀이하다 갖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어린 마음에 몰래 그릇하나를 숨겨 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달라져 요즘은 흔한 것이 플라스틱용기들이고 재활용 분리수거 통이 넘쳐나는 골치 덩어리에 속합니다.

재활용품은 좋은 장난감

이것들을 의미 있게 잘 활용하는 곳이 유치원입니다. 유치원 교실의 미술영역은 골라 쓰기 좋게 정리가 잘된 잡동사니 창고입니다. 나무젓가락, 빨대, 숟가락, 요구르트·요플레 용기, 화장지 속대, 각종 상자, 병뚜껑 등등. 이런 물건들은 비싸고 귀하고 새것인 물건들을 이용할 때 보다 훨씬 자유롭고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잘못되면 버려도 무방하고 없어지면 몇 번이고 다시 가져와 보충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심을 없애줍니다. 새하얀 종이를 주고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틀리거나 망칠까봐 마음이 위축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읽고 난 신문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주변에 흔한 신문지는 구기면 공이 되고 접으면 모자도 되고 아이들에게는 커서 옷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인가 이미 빼곡이 쓰여 있어서 그 위에 무엇을 맘껏 그리고 뚫고 찢고 해도 뭐라는 사람도 없고 아까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문지는 학기 초 아이들의 불안을 풀 수 있는 좋은 재료입니다.

모두 함께 그리는 합동화도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보다는 종이에 무엇인가 하나를 먼저 그려주면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하나둘 그림에 참여합니다. 똑같이 종이를 주고 무엇 무엇에 대해 그리라고 하면 거부하거나 짜증내는 아이들도 부담이 없어서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에 열중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폐품을 활용해서 무엇인가 만드는 일이 그림을 그리는 일보다 훨씬 수월합니다. 그린다는 것은 알고 보면 아주 세밀한 작업입니다. 마음먹은 대로 곡선과 직선 면과 색을 나타내는 일은 어른들에게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활용품은 원래 형체가 주는 완성도가 있어 미숙한 솜씨를 돋보이게 해서인지 아이들은 제 작품에 대한 만족감이 제법 큽니다. 상자나 원통에 몇 개의 소품만 붙여줘도 자동차나 비행기 동물들이 그럴싸하게 만들어집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작품 전시대가 부족할 정도로 빼곡이 만들어서 제 작품을 늘어놓곤 합니다. 이렇게 하염없이 만들어지는 작품들은 유치원에서나 가정에서나 사후 처리가 곤란합니다. 유치원에서는 25명 내지 30명의 아이들의 작품을 전시해 줄 장소가 마땅치 않아 주말이면 자기가 만든 것을 집에 가져가기로 정하곤 하는데 집에서도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아이들의 동의 없이 처리돼 가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만든 작품 소중하게

반에서 제일 어린 편이고 아직 자신감이 부족해 쭈뼛대는 꼬맹이가 요즘 들어 부쩍 만들기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어줍잖은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나름대로는 꽤나 대견한가 봅니다. 상자에 요구르트병 하나 붙여놓고도 좋아하고 똑같은 과자 상자 두 개를 붙이고 ‘쌍배’라고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말, 가져가지 않은 작품들을 쓸 것과 못 쓸 것을 분리해서 정리를 해버렸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꼬맹이가 “선생님 내가 만든 것들이 없어졌어요”하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제 깐에는 집에 꼭 가져가고 싶었는데 없어져버려 난감했던 모양입니다. 미안하다고 몇 번씩 사과하고 사정을 말해주었습니다. 아이는 또 다시 작품을 만들었고 이번에는 주말까지 기다리지 않고 집에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가져간 ‘작품’들이 또 어떤 수난을 받을지 걱정됩니다. 가정에서도 아이와 함께 ‘상의’해서 아이의 작품과 마음이 존중받고 아이에게는 부모의 입장을 듣기도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대회에서 받은 상장이라거나 트로피라면 아이보다도 부모님이 정성으로 보관하고 극진히 대우했을 것입니다. 이런 한 순간 한 순간 스스로가 존중받고 소중히 여겨지는 것들이 쌓여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어나는 봄꽃들이 뜨거운 그릇 속에서 퐁퐁 터지는 팝콘 같습니다. 이 번 주에는 아이들과 함께 팝콘을 한 솥 튀겨서 맛도 보고 쓰다 남은 빨대와 함께 목걸이도 만들고 나뭇가지에 붙여 꽃나무를 꾸며볼까 합니다.

/안호형(창원 토월초교병설유치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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