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50대 가장의 살아나기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일 낮에 비가 뿌렸다.

김창수(가명.50.창원시 대방동)씨의 얼굴에는 제 노릇 못하는 가장과 자식이라는 힘겨운 두 짐을 짊어진 그늘진 표정이 빗물에 얼룩져 있었다. 어렵사리 약속된 만남이어선지 김씨와 기자는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잠시 숨을 돌린 후 입을 떼기 시작한 김씨는 지난 98년 연말 회사로부터 명예퇴직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정리해고를 당한 대기업 엔지니어 출신 실직자라고 신분을 조심스레 밝혔다.

김씨는 부인(45)과의 사이에 대학 1년과 고교 1학년에 재학중인 두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하나를 둔 ‘한참 목돈이 많이 들어갈 중년 가장’이다. 그러나 마땅한 벌이가 없어 아파트 담보로 은행서 대출받은 돈과 퇴직금(그나마도 얼마남지 않았다)으로 월 300만원 넘는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부인 또한 몸이 아파 나가던 식당일을 그만두고 말아 네식구가 자신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정리해고 당한’ 김씨의 ‘가장 노릇을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뜻하지 않은 암초에 걸려 번번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엔지니어 출신인 김씨가 전업을 위해(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 다닌 곳만해도 대구의 선지국밥 전문집.천안의 순대전문점 등 한 두군데가 아니다. 이마저도 창업 자본금이 1억원 이상 소요되는 바람에 중도하차의 고배를 마셨다.

“ 결국 모자라는 아이들 학자금을 비롯한 생활비는 연금 생활자인 부모님께 손을 벌이는 ‘못난 자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회사에 다닐 때는 많지는 않지만 얼마간의 용돈을 부모님께 쥐어주던 ‘듬직한 맏아들’이었는 데….”

‘눈높이’를 낮추지 않으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는 주위의 충고에 노동부 고용안정센터 문도 두드려 봤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미래가 불확실한 투자취업이 대부분이었고 이마저도 퇴직금을 노린 사기성이 농후해 선뜻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김씨는 쥐꼬리 정보라도 얻기 위해 생활정보지나 신문정보,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실직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소득은커녕 실망감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돌아온 것이라고는 나빠진 건강뿐이었다.
한때 아파트 한채에 직장에서도 간부급에 속하는 차장으로 재직할 당시만해도 “나도 이젠 고생 끝에 중산층에 진입했구나”하는 안도감과 자신감이 있었다.

그 자신감은 직장의 울타리에서 밀려난 차간운 현실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어느날 자신도 ‘중산층의 몰락군’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김씨는 요즈음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넋두리가 있다. “ 정치인을 포함한 정책결정권자와 상위 5%로 분류되는 사람들에 의해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고 그 피해가 고스란히 열심히 일만해 온 자신과 같은 40~50대 가장에게 떠맡겨져 허리띠 졸라매기를 강요당하고 아무리 아껴도 대책없는 적자인생과 실직인생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씨는 20대80 사회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지적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 20대80 사회가 아니라 10대90 사횝니다. 이런 사회 구조가 못 가진자에게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죠. 그 장벽 때문에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나 실업대책, 창업자금 지원 등 일회성 대책이 마냥 공염불로만 들릴뿐입니다.”

김씨와 비슷한 시기에 직장에서 쫓겨난 40~50대 실직자중 박모(49.창원시 남양동)씨는 은행보다 이자가 높게 나온다는 말만 믿고 선뜻 퇴직금과 위로금으로 받은 1억원을 유사 금융업인 파이낸스에 맡겼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한푼도 건지지 못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김모(51.김해시 외동)씨는 포장마차와 노점상을 하다가 현재는 상가 경비원 생활을 하며 칠순의 노모, 자녀 2명과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외에도 상당수 퇴직자들이 파이낸스와 주식투자 실패로 생계의 마지막 담보인 퇴직금을 날리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김씨는 그나마 쥐꼬리 금리이지만 은행에 돈을 맡긴 동료 퇴직자들이 부럽기만 할 뿐이다.

잔인한 달 4월도 갔다. 그래서 김씨는 희망의 달 오월에 나름대로 적지 않은 기대를 하고 있다. 설령 그 기대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오월은 김씨에게 뭔가 특별한 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이 온다. 비교적 적은 투자로 가족들의 최소 생계라도 이어가기 위해 조그마한 음식점을 열어 볼 생각이다. 또 지긋지긋한 송사도 오월에는 어떤 형태로던 결판이 날 것같아 다소 마음이 가벼워지는 중이다.

“진달래꽃의 화사함은 누구나 쉽게 압니다. 그러나 그 꽃이 지고난 뒤에 돋아나는 잎사귀는 아무에게도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이고 꽃과 잎이 함께 피는 철쭉은 오월의 꽃으로 철쭉은 혼자서만 자태를 뽐내지 않고 잎사귀와 함께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한마디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비 뿌리는 길거리로 나서는 김씨의 뒷모습에서 ‘몰락한 중산층’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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