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흑인거주지역, 슬램의 한 공립고등학교로 교사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사고 치지 않고 그나마 제대로 출석이라도 해주면 다행일 정도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학교가 만든 교과과정을 들고 학생들 앞에 나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녀석은 토끼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어떤 녀석은 가구 만들기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것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제, 선생들은 모여앉아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답이 있을 리 없었다. 선생들이 더 많이 시간을 쪼개고 일일이 학생을 지도하는 것 외에는.

배우고 싶은 걸 가르쳐라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고 걸음걸이가 활기차졌으며, 열중하기 시작하였다. 토끼를 더 잘 키우기 위해서는 생물학과 화학을 배워야하고, 좋은 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하와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도 자명한 이치였다. 학생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위해서 궁극적으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교사는 학생들의 열렬한 욕구를 지도하는, 그야말로 지도자가 되었다. 결국 이 학교는 인근의 사립학교 학생들이 전학 오고 싶어 하는 학교가 되었다.

이 성공적 교육개혁은 교사의 자각과 헌신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선생이란 무엇인가. 어릴 적 나는 그것을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배웠었다. 그것도 나를 가르친 선생에게서 배웠었다. 그렇다면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먼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선생인가.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통하여 배운다. 그래도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선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근에야, 선생이란 ‘앞에서 삶을 이끄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깨달았으니, 이제 가르치는 일을 그만 둘 때가 되었기 때문일까.

오늘날 공교육 황폐화가 거대한 사회문제로 되어 있다. 심지어 공교육이 사교육에 비하여 경쟁력이 없다는 말까지 들린다. 당연한 말이다. 성적 제조능력에서 학교와 학원을 경쟁시키면 학교는 백전백패한다. 왜냐하면 이 경쟁이란 학원과 학원강사에게는 생존을 건 문제인 데 반해, 학교와 교사들은 여전히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교사의 경쟁력 문제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이 경쟁에서 학원이 백번 이긴다 하더라도 이 사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스스로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

자본주의에서 교육은 당대 자본주의의 요구를 반영한다. 70, 80년대 단지 훈련받은 지식과 인내심을 요구하던 한국사회에서, 주입식 교육과 그에 따른 성적표는 그런 의미에서 충실히 그 임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창조력과 감수성, 그리고 통찰력을 요구한다. 여기에서는 지식의 양으로 결정되는 성적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런 지식이란 잡동사니에 불과할 따름이다.

판단컨대, 여전히 70, 80년대에 머물고 있는 한국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도태하고 있는 중이다. 교육에서의 평등주의와 엘리트주의 간의 논란과 싸움을 격렬히 벌이고 있는 동안,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잊혀진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민주적인 시민을 만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세계에서 살아남을 국가를 이끌 인재를 키우는 것이다. 지도적 인재를 키울 희망이 없는 한, 그것이 평등이든 엘리트이든 어떠한 주장도 쓸모없는 춘몽이다.

A.스미스 ‘국부론’의 기본정신은 이기적인 인간행동에 의한 자연적 조화의 달성이다. 빵쟁이, 구두쟁이 그리고 양복쟁이는 스스로 돈을 벌기위하여 질 좋은 빵, 구두, 그리고 양복을 만든다. 그러나 이 모든 상품들이 교환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좋은 빵, 구두, 그리고 양복을 얻는다. 이기적 행동의 결과가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합리적 상태에 도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원리는 자유경쟁이다. 만일 누군가 영원히 구두시장을 독점한다면 더 이상 질 좋은 구두를 기대할 수 없다.

지금 학교와 교사들이 사교육을 탓하는가. 한 없이 입시제도만을 탓하고 있을 것인가. 학생들에게 보다 높은 차원의 경쟁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일치단결 하여 나설 때가 아닌가.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 자신부터 경쟁과 도태를 도입하는 것이 최소한의 헌신의 시작은 아니겠는가. ‘선생’으로서 헌신하고 희생할 때에야, 비로소 학생과 사회에 대한 정당한 요구가 시작될 수 있다. 선생이란 유치원교사에서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것이다.

/정용택(경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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