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고전적인 표현으로 굳어진‘20 대 80 사회’. 이같은 사회 양극화의 귀착지는 이른바 ‘신귀족문화’의 득세와 그에 따른 상대적 빈곤층의 증가다. 전자는 ‘부의 원천이 변화할 때 그에 따르는 새 귀족계층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배타성을 강화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우려를 자아낸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배타적인 지배귀족문화가 꽃핀 시기치고 국가와 사회가 발전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예가 없다. 귀족문화가 융성했던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는 이런 면에서 소중한 교훈을 남긴다. 청담과 현학이 융성하고, 양조(梁朝)를 통해 불교가 찬란한 꽃을 피운 것을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80에 해당되는 민중이 척박한 삶을 영위하고 그리하여 종래에는 짚단 쓰러지듯 국가가 패망으로 치달은 것이 그 실상이다.

“동진의 귀족 석숭은 손님을 초대해 연회를 열 때마다 항상 미인들로 하여금 술을 권하게 했는데 손님이 술을 다 마시지 않을 경우 황문(환관-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고관의 집에서도 환관을 고용했다)을 시켜 시중 든 미인을 번갈아 목베게 했다. 한번은 승상 왕도와 대장군 왕돈이 함께 석숭을 방문했다. 승상은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돌아오는 술잔을 다 받느라 진탕 취하고 말았다. 반면 대장군은 한사코 술을 마시지 않으며 일이 어떻게 돌아가나 보고 있었다. 이미 세명의 미인을 목베었지만 대장군은 안색조차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마시려 하지 않았다. 이에 승상이 그를 질책했더니 ‘자기 집 사람을 자기가 죽이는데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대답했다.”

세설신어 태치(汰侈)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변태적인 사치의 극을 말하는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나라를 필두로 동진.송.제.양.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귀족은 다른 시대에 존재했던 소수의 귀족과 분명하게 구별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표현되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을 전제로 한 귀족이 아니라 오로지 일신의 안일과 가문의 영광에만 매달리던 부류였다.

송서(宋書) 사령운전(謝靈雲傳)의 산거부(山居賦)에는 당시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이 이렇게 표현돼 있다. “초목은 무성하고 시내와 산골물이 절벽과 봉우리와 서로 어우러져 있다. 은행나무.귤나무 숲이 있고 밤나무 단지가 있다.” 공령부전(孔靈符傳)은 “영흥에 별장을 세웠는데 둘레가 33리이고 별장 안의 물과 육지의 넓이가 265경(頃)이나 됐다. 산을 두 개나 끼고 있으며 과수원도 9개나 된다”고 전한다. 남제서(南齊書) 고환전(顧歡傳)에는 “귀족과 세력있는 무리와 재산있는 집안은 수레와 복식.기생.악기 등을 서로 다투어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했으며 정자와 연못.집은 경쟁하듯 화려하고 높게 지었다. 산과 늪에 사는 백성들은 감히 그곳의 풀과 물을 뜯거나 마실 수가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서민과 유리된 귀족집단의 외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남조 귀족의 배타적인 풍조는 위진시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삼국지 공손찬전 주에 인용된 영웅기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공손찬이 안팎을 장악했을 때 벼슬아치의 자제로 재능이 뛰어난 자들을 곤궁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가두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벼슬아치의 자제와 유능한 사대부, 부귀한 자의 자제들은 모두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들이 맡은 직책은 그들이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공로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다.’” 공손찬의 이 말은 당시 지방귀족계층이 정서적으로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 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동진에서 송.제.양.진으로 이어지는 남조는 북방으로 침입한 호족(胡族)에게 밀려 건강(지금의 남경)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간 왕조다. 그래서 당시 남조의 사람들은 정권이 북벌을 감행하여 그들에게 안겨진 이산의 고통을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했지만 남조 귀족집단은 그런데는 관심이 없었다. 조적과 환온 등 북벌파의 군사행동을 적극 저지하는 한편 양전(良田)과 미택(美宅)을 점탈하는데만 온 신경을 쏟았다.

청대의 시인이며 화가인 정판교는 남조의 쇠망을 이렇게 노래했다. “일국이 흥하면 일국이 망하는 법이지만/육조의 흥망 왜 그리 총망하단 말인가/남인(南人)들 장강 물길 길다 자랑하지만/이 물길 종래 왕조 길었음을 보지 못한 걸.” 이 노래는 화려한 외양속에 감춰진 남조의 반민중성을 영탄조로 드러낸다. 20 대 80을 아우르는 노력없이 20의 기득권만을 주장하던 남조(서기 317~588년)는 불과 270년동안 다섯 왕조가 부침을 거듭하는 혼란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이 시기에 살았던 많은 백성들을 힘겹고 무거운 고통속에 빠트렸다. 정판교의 시는 바로 이런 상황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20 대 80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신귀족으로 일컬어지는 특권층을 배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는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질주를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일반백성과 유리되는 그들만의 문화가 융성하게 되며, 그것이 고착화되면 종래에는 사회 전체가 허물어지게됨을 경고한다. 남조시대의 귀족들이 추구하던 양전과 미택을 요즘 용어로 치환하면 이른바 최고에 해당되는 각종 품목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신귀족을 “소비를 즐기는 경향은 있지만 부에 대해 냉철한 의식을 갖고 있는 만큼 사회적 물의를 빚던 오렌지족과는 다르다. 그들은 예술지향적이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히려 세속적 성공과 자유정신의 균형을 꾀하는 미국의 신상류층인 보보스를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조의 귀족계급도 노장사상에 뿌리를 둔 청담과 현학을 즐기며 ‘예술지향적이면서도 고상한 생활’을 즐겼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지녔던 예술지향적이고도 고상한 면은 21세기 한국 신귀족층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남화(南畵)니, 왕가서법(王家書法)이니 하는 역사적 유물이 이 시대의 소산이다.

20 대 80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그래서 좀체 잦아들지 않는다. 작가 홍세화는 한국을 ‘기득권이라는 견고한 성채에 자리한 사회귀족들의 공화국’이라고 말했다. 역사는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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